성공한 사람들의 수기를 읽어 보면 대부분이 째는 소리거나 진실을 감추고 모범 답안 같은 발언뿐이다, 설혹 그것들이 진실이라 하더라도 모방을 하며 따라가자니 이미 기차 지나가고 나서 손드는 격이라 망설여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곱씹어 보면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과 요소가 몇 개씩은 보인다.
사업이 망하거나 감옥에 간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는 ‘운이 없어서’ 혹은 ‘재수가 없었다’고 답변한단다. 하지만, 그들의 변명을 무시하고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사실, 다른 사람이 무엇이 되었고 어떻게 살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기 위한 참고 자료일 뿐이니, 그런 일에 한 눈 팔아 길게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들은, 바쁘지 않고 한가할 때 또는 자신의 살아온 궤적을 반추하며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았는지 비교해 보고 싶을 때, 스치듯 잠시 살펴볼 일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때에도, 지나치게 귀가 여려 판단력을 잃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선입견을 지우고 세심하게 관찰해야 일부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 유사시에는 조금이라도 써먹을 수 있지 않겠나?
어렸을 때부터 나는 싸움꾼이었다.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면, 지루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승리보다는 죽도록 맞거나 처참하게 패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나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흥미를 느끼기보다는 강하고 못된 놈들에게 도전하고 대들다가 나온 결과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어가면서, 차츰 횟수도 줄고 승률도 올라갔다. 싸움 기술이 늘기도 했지만, 질 것 같고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피하는 일이 잦아졌기 째문이다. 하찮은 일에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서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남자들끼리 모여 사는 세계(요즘은 한국도 여자 선원이 상당수 있지만, 오랫동안 북유럽의 바이킹 후예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선박에서 여자들이 승선하는 것을 꺼렸다.)에서, 그것도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치안 부재의 바다 한가운데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선원들을 통솔하는 데는 완력이 필수 요소였다.
강하게 부딪히기보다는 잔머리 쓰고 뒷공작이 판치는 시대로 변했으니 싸움이나 지휘 방법도 같은 방향으로 바꿔야 생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생존만이 능사는 아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도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꼬리 없는 원숭이>도 결국은 동물의 일종일 뿐이다. (만약 내가 중세의 유명 인사였다면 이 발언도 진화론자로 배척받을 위험이 있지만, 다행히 지금은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는 보장되는 시대다.) 지리산 중턱에서 태어나 조력자도 없이 험한 세상과 박치기하며 살아온 내가 사람대접을 받고 천수 비슷한 걸 누리게 된 것도, 항상 건강하고 활력이 넘쳤던 결과다.
어떤 경우라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발소의 면도사, 아내, 요리사 등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 싸워서 이긴다 해도 빛이 나지 않고, 사이가 벌어지면 피곤하고 목숨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나폴레옹과 이발사>라는 유명한 연극도 있었지만, 필리핀 선원들은 휴가 때 귀가하면 절대로 바로 누워서 자지 말라는 농담을 자주 한다. 질투 많은 아내의 기습 공격을 대비해 엎드려 자라는 뜻이다.
욕쟁이 미국 선장이 십 년을 동승한 요리사에게 “함께 일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이제부터 너에게만은 욕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단다. 그러자 요리사가 “그러면 나도 네 접시에는 더 이상 침을 뱉지 않겠다.”라고 맹세하더란다.
또 다른 선장은 식사를 하다가 맛이 이상해서 요리사를 불러 물어봤단다.
“오늘 메뉴는 토끼고기라고 하지 않았나?”
“냄새를 줄이려고 말고기를 쬐끔 섞었습니다.”
“얼마나?”
“반반씩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토끼 반 마리에 말 반 마리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대학 시절, 교수님께 들었던 얘기다. 장을 담는 종지에 물을 붓고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물감에 따라 금방 색깔이 변하지만 바다에는 갖고 있는 물감을 전부 쏟아부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
<장 종지>가 되지 말고 바다와 같은 큰 그릇이 되라는 당부의 말씀이셨지만, 바꿔 생각하면 체급이 다른 상대와는 다퉈 봐야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적당히 타협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싸울 대상을 찾고 투쟁하는 곳이 아니라 융화하고 그 움직임에 따라 몸을 맡길 상대다. 세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흐르는 방향을 바르게 파악하여 역조가 아닌 순조를 타야 한다.
실내 수영장에서 하는 수영과 험한 바다에서 하는 헤엄치기는 방법과 자세가 모두 달라야 한다. 전자가 속력을 내는데 치중한다면, 후자는 오래 버텨서 생존하는 게 목적이므로 속력 같은 건 부차적인 기능에 불과하다.
속력이 빨라서 이득을 보는 건 극히 소수의 수영 선수들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체력 보강과 생존 능력을 기르는 쪽인데도 앞쪽의 기록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세상의 험한 파도를 이길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입은 다물고 귀를 열어야 한다고 많은 선지자들이 충고했지만, 우리는 듣기보다는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과 유사한 관계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하는 능력을 주신 것은 타인을 설득하라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말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또한, 귀로는 들으면서 눈으로는 현미경으로 보다가 때로는 망원경으로 바꿔 쓰는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도 중요한 지혜다.
(다양한 각도에서 정보를 모으기 위한 과정인데, 기본적인 자료가 부족하면 그 후속 작업의 성과도 빈약해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니면 미끼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없으면 어렵게 수집한 것들이 모두 무용지물로 변하므로, 그걸 기르기 위해서 우리는 독서도 하고 직간접의 경험을 쌓는 수련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어 그것들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엉뚱한 목적지로 인도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강하게 부딪히기보다는 잔머리 쓰고 뒷공작이 판치는 시대로 변했으니 싸움이나 지휘 방법도 같은 방향으로 바꿔야 생존이 가능한 건 사실이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도전이 요구될 수도 있으니 나의 경험담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예단하고 미리부터 기죽을 까닭은 없다.
내가 젊었을 떼, <토지>라는 대하소설이 발표되어 세인의 관심을 받자 연속극으로 만들어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무대가 내 고향 하동이었는데 읽다 보니 주인공들이 쓰는 사투리는 아무리 봐도 하동 게 아니라 진주 말이었다.
같은 경남 서부 지방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대가로 자처하는 소설가라면 이런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읽다가 신경질이 나서 한밤중에 차를 몰고 원주에 있던 작가(박경리 여사)의 집을 급습해서 이 문제를 지적했던 적이 있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내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한다.’
‘훈수 잘 두는 사람일수록 바둑 실력은 형편없다.’
나에게 필요한 동서양을 대표하는 격언들이다.
이미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다. 내 말을 듣더니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시고 나서,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갖고 갔던 책에 서명을 해 주셨다.
한참 동안 보물로 여기고 간직했는데, 그동안에 이사를 여러 번 했고 내가 집을 떠나 산 기간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책장에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내가 당시의 그분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내가 살면서 터득한 경험들을 누군가에게 전수해 주고 싶은데, 손주들이 자라는 속도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서 안경을 쓰고도 잘 보이지 않는 자판을 이렇게 열심히 두들기고 있다.
진시황이나 정주영 회장 등이 불사약을 찾았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들이 조금 더 살고 싶었던 건 단순히 목숨을 오래 부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던 일들을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은데, 내가 하고 있는 이 작업은 그들만큼 절실하지는 않다.
내가 살아온 경험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아들들에게 전해 줘야 했는데 그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아쉬움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은데 늙은이로 변했다는 안타까움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입버릇처럼 <대인소인론>을 펴던 부친께 내가 ‘그렇게 속상하시면, 스스로 대인이 되시지 그랬어요?’ 하며 대들었듯이, 누가 나에게 ‘싸움을 그렇게 잘했으면, 격투기 선수로 나가셨어야죠!’ 하고 빈정대도 대꾸할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