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기나긴 밤을

by 차희의 유희

이주는 오늘도 빠른 걸음으로 출근길에 나섰다.

밤의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유는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통의 리듬 속에서 홀로 멈춰 서는 것이 오히려 더 버겁게 느껴졌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달빛은 은은히 자취를 감췄고, 공기에는 겨울의 무게가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붕세권이라는 말, 괜히 나오는 게 아니지.’

늘 붐비는 붕어빵 트럭 앞을 지나칠 때마다 이주는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날, 아이를 본 이후로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어쩐지 눈길이 가곤 했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붕어빵 트럭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없네?’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의 시선은 곧 다른 곳에 멈췄다. 거기에는 다소 낯선 이가 서 있었다.

오래된 듯한 낡은 옷과 구부정한 허리, 금색 실로 월계수가 수놓아진 검은색 모자, 그 아래로 아무렇게나 잘린 머리카락. 그러나 이주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그런 외형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서린 묘한 기대감이었다.

문득 시운의 말이 떠올랐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따뜻했던 기억 하나쯤 붙잡으려 하는 거야.’

그 말이 차갑던 밤공기를 가볍게 흔들었다.

‘에휴, 임이주! 제발 오지랖 좀 그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타일렀지만, 발걸음은 이미 멈춰 있었다.

“어르신, 혹시... 붕어빵 좀 드실래요?”

그녀는 붕어빵 봉지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어색함이 배어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노인의 행동에 뿌연 안경을 벗어 닦으며 황급히 덧붙였다.

“아! 오해는 마세요. 날도 너무 춥고... 더구나 오늘은 밤이 가장 긴 날이잖아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붕어빵 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떨리는 손끝으로 붕어빵을 받았다.

“... 고맙습니다.”

낮고 쉰 목소리에서 묻어난 진심은, 이주가 예상치 못했던 무게로 다가왔다.

그는 잠시 봉지를 내려다보다가 이주의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눈이... 참 맑은 분이시구려.”

노인의 말에 자신의 정체를 들킨 듯 황급히 고개를 꾸벅이곤 걸음을 옮겼다.

‘다음부턴 정말 참아야지.’

그녀는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발걸음에는 가벼움이 묻어 있었다.

언제나 가장 먼저 출근하는 이주는 약국 안을 정리하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오픈 시간까지는 작은 여유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짧은 숨을 내쉬며 한 박자 쉬어가는 절정에 이른 어둠의 고요를 음미했다.

그러나 맑은 종소리가 그 순간의 고요를 가볍게 깨트렸다.

“딸랑딸랑.”

문 너머로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정실장이었다.

“정실장님! 이렇게 일찍이요?”

이주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며 다가섰다.

“우리 딸이 좋아하던 쿠키를 몇 개 구워봤어요. 직원분들과 나눠 드시라고요.”

정서경은 카운터 위에 담백한 미소와 함께 작은 봉투를 내려놓았다.

“어머, 감사해요. 정실장님, 따님이 있으셨어요?”

봉투를 받아 든 이주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럼요. 지금은 다 컸지만요. 그럼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일이 많아서요.”

정서경은 손목시계를 흘낏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아, 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종종 간식을 나눠주던 서경을 보며 이주는 환히 웃었다.

서경은 이주를 보며 그녀의 엄마인 선혜를 떠올렸다. 그녀가 선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언젠가는 그 사연을 이주가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정서경은 자신이 선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무릎을 꿇었던 일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이주는 정실장에 대해 몰랐던 사실에 그녀의 뒷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다들 사연 하나쯤은 품고 살지.’

이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간단히 정리한 뒤, 다시 일을 시작하려 했다.

그때, 직원용 출입문 쪽에서 기척과 함께 문이 열렸다.

‘벌써 직원들이 왔나?’

이주는 고개를 돌렸지만,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안차사였다.

"차사님 오셨어요?"

이주는 안차사를 반갑게 맞았다. 혹시 호경에 대한 소식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도 스쳤다.

“잠시 쉬어가려 들렀네. 사색을 방해한 건 아닌지?”

안차사는 특유의 가벼운 말투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에요, 차사님. 어서 앉으세요. 날이 추운데 차라도 드릴까요?”

“부탁하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주는 찻잎을 골랐다. 차사들이 추위를 느끼지는 않지만, 그녀의 대접을 거절한 적은 없었다.

“재스민 차예요. 서양의 문물을 좀 맛보시라고요.”

이주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농담을 던졌다.

안차사는 잔을 집어 들며 웃음을 머금었다. 오랜 시간 서로 익숙해진 덕에 이러한 농담쯤이야 나눌 수 있었다.

잠시 후, 직원용 문이 기운차게 열리며 수영이 들어왔다.

“아이 깜짝이야! 차사님! 새로 온 직원인 줄 알았잖아요.”

수영은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지만, 말을 마치고 난 뒤 슬쩍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오늘 여기로 출근했네.”

안차사가 여유롭게 농담을 받아주자, 수영은 웃으며 안도했다

이어 다온과 은호도 차례로 출근하며 문을 열었다.

“아이 깜짝이야!”

그들은 안차사를 보며 연달아 놀랐다. 언제 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운향원의 오픈 준비가 마무리되고, 문이 열리자 기다리던 영혼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마다 청령에서 받은 종이를 가슴에 품고 약국의 공기를 채워 갔다. 늘 그러듯, 운향원의 새벽은 분주한 일상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차를 다 마신 안차사가 몸을 일으킨 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가시려고요?”

다온이 안차사를 올려다보며 물었지만, 안차사는 대답 대신 운향원의 문을 빤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웠다.


길 건너 어둠 속에서 누군가 운향약국의 간판이 천천히 바뀌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간판에 서렸던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느릿한 걸음으로 길을 건넌 그는 조심스레 약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딸랑.”

문이 열리자 약국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그의 옷차림은 세월의 때가 겹겹이 쌓여 본래의 색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행색은 누가 봐도 노숙자였다.

대기 중이던 망자들도 처음엔 호기심을 보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코를 막듯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났다. 약국 안에는 긴장감이 돌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의 행색보다 중요한 건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안차사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주변으로 움직였다. 그가 다가가자 몇몇 영혼들은 움찔하며 물러났다. 차사에게 붙잡힐까 두려운 듯, 구석으로 몰려 눈치를 살폈다.

안차사는 그 노숙자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주변을 살폈다.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피곤하고 상한 인간의 냄새뿐만이 아닌, 깊은 욕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간혹 우연인지, 아니면 운명인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이곳의 문을 여는 인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느끼지 못할지라도, 이곳의 문턱을 넘는 순간은 그들과 이곳에 머무는 영혼들에게도 위험을 동반한다.

약국 안에 있는 망자들 중에는 인간의 몸을 탐하려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이주는 출근길에 붕어빵 가게 앞에서 만났던 노인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어떻게 여길...?’

순간적으로 당황한 그녀는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어서 오세요. 필요한 약이 있으신가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상처 연고 하나 주시오.”

그는 간단히 말했다.

이주는 서랍에서 연고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일반 의약품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건 필요 없으세요?”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며 말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다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뗐다.

“여기... 다른 것도 판다고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약국 안의 공기가 팽팽히 긴장됐다. 안차사는 눈길을 좁히며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이주를 바라보더니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눈이 맑은 젊으니... 역시...”

그녀를 알아본 듯한 그의 말에, 이주의 표정이 굳었다.

"35년 전, 하루의 시간만 팔아 주시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약국 안은 잠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즉시 안차사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차사의 표정은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주는 숨을 고르며 차분히 말했다.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찾으시는 곳이 여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떨림을 감출 순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다 알지는 못하지만, 이곳이 평범한 곳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는 약국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간판이 바뀌는 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나는 그 하루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두려움, 그리고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내 안차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대가는 제 목숨이면 되겠습니까?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을 테니.”

그의 단호한 말에 약국 안의 공기가 더욱 묵직해졌다.

남자의 눈빛은 자신과 이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으며, 그의 간절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했다.

이주는 자신의 떨리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이곳을 알고 오는 인간들은 저마다 깊은 사연을 품고 있지만, 차사 앞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뜻을 밝히는 이는 처음이었다.

안차사는 잠시 그의 시선을 받아내더니, 이주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안차사의 의중을 알아차린 이주는 눈빛을 정돈하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어르신, 어느 정도 알아채시고 오신 듯 하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느끼신 바와 같이, 저희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저나, 직원들 모두,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인간이 시간을 관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침착한 대답에 남자는 고개를 들고 천천히 약국의 등불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빛이 그의 깊은 주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그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럼, 인간이 아닌 분도 계시니, 내 사연을 한번 듣고 판단해 주시렵니까?”

남자의 말에 약국 안의 공기가 다시 한번 묵직해졌다.

이주는 그가 단순한 노인이 아님을 깨달았다. 차사를 직접 보지 못했어도, 그는 분명 그들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안차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결심이 선 듯 보였다.

이주는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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