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때가 되었을뿐 2

by 차희의 유희

한마디로 말하자면, 호경은 떠도는 영혼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망자가 저승으로 인도되는 것은 아니다.

풀지 못한 한이 남아 있거나, 자신의 죽음조차 모른다거나, 저승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호경 역시 어딘가에서 어긋난 것이 분명했다.

창가로 약한 불빛이 안을 비추자, 어른거리는 빛만큼이나 얕은 적막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엇이 그녀를 붙잡고 있는 걸까.

그때 문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고요를 깼다.

"차사님들 오셨어요?"

이주는 차사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문을 들어서던 그들이 잠시 멈칫한 순간을 본 건 다온 뿐이었다.

다온은 곧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차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처사님들! 약사님이 저렇게 반가워하시는 건 다 목적이 있는 거니까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그 말에 이주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다온은 능청스러운 웃음으로 넘겼다. 차사들은 두 사람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다온에게 귓속말을 했다.

“맞았는데 왜 좋아하는 겐가?”

“사회생활입니다. 차사님. 하하”

차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다가왔다.

“차사님들, 우선 앉으세요. 차 한잔 하시면서 천천히 들어주시면 돼요.”

"오늘은 커피 어떠세요?"

이주가 능숙한 손길로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홍차사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이제 서양 숭늉쯤이야 즐길 줄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농담처럼 건넨 말에 약국 안은 잠시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커피가 담긴 금테 잔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초콜릿 향이 공간을 감쌌다.

이주는 차사들에게 커피를 내려놓으며 함께 앉았다.

“향이 참 좋군.”

이주는 조심스럽게 호경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의 불안감은 감출 수 없었다. 차사들은 커피를 음미하며 말을 아끼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혹시 왜 떠도는 영혼이 된 건지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저러다 이승에 미련이 더 깊어지면 어쩌나 걱정돼요.”

달콤한 향기와는 달리, 입안에 퍼지는 커피는 꽤 쌉쌀했다. 차사들은 잠시 서로의 표정을 읽으며 묵묵히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우리도 이제 제법 커피 맛을 즐길 줄 알게 되었군. 그렇지 않나, 홍차사?”

안차사가 잔을 가볍게 들며 말했다.

“그렇지. 자꾸 마시다 보니 새로운 맛을 알아가는 게야.”

홍차사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이주를 바라보았다.

“자네, 떠도는 영혼들이 왜 생기는지 아는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이주는 차사의 말을 듣자 간과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보통은 한이 깊거나, 길을 잃거나,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는 경우라고 알고 있어요.”

"그럼 그 친구 또한 그러한 이유가 아니겠나? 때가 되면 저승길이 자연스레 열릴 것이야."

안차사가 잔을 만지작거리며 담담히 말했다.

“결국 정해진 운명 아니겠는가.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

차사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다 저승으로 가기를 거부하면 어쩌죠?”

안차사는 잠시 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또한 그 친구의 운명이겠지. 자네는 그저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게나.”

이주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박혀 있던 감정을 들킨 듯 얼굴을 붉혔다.

"다 마셨으면 이만 가지."

홍차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걸쳤다. 두 차사는 간단히 인사를 남기고 약국을 떠났다.


이주는 문을 닫고 돌아서며 아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차사들에게서 무언가 답을 얻으리라 기대했던 탓이었다. 테이블 위에 남겨진 커피 잔들을 바라보며 이주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반이나 드신 걸 보니 입에 꽤 맞으셨나 보네.”

그녀는 식어버린 커피와 함께 호경에게 향했던 감정도 마침내 흘려보냈다.


밖으로 나온 두 차사는 운향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은은한 빛을 내뿜는 간판과, 희미하게 보이는 약국 내부의 따스한 조명이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녹진하게 번져 있었다.

“혹시 끌려가던 영혼은 아니었겠지? 지옥행은 아닌 듯해 보이는데... 걱정이 되는군.”

안차사가 낮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홍차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일세. 요즘엔 워낙 기척도 없이 일이 일어나니 수사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나 보더군, 답답한 노릇이야.”

두 사람은 잠시 침묵 속에서 걸음을 옮겼다.

“황천강에 망자보다 뱃사공이 더 많아질까 걱정일세.”

홍차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안차사는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기다 고개를 돌려 홍차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주 같은 이가 있으니,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거겠지.”

두 차사의 묵묵한 걸음은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점점 기척을 지워냈다.

아무런 수확 없이 돌아온 이주가 고민 끝에 내린 답은 차사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차사님들께 여쭤봤는데...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하셨어. 그냥 때를 기다리라고...”

기대, 혹은 두려움, 아쉬움에 찬 눈빛으로 이주를 바라보던 호경은 이내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괜찮아. 그래! 저승사자 말처럼 다 이유가 있겠지. 데리러 오시면 그때 가지 뭐!"

그녀의 밝은 대답에 이주는 다소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은호는 호경의 미소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표정에는 묘한 안도감이 보였다.

‘벌써 미련이 달라붙기 시작한 건가...’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주는 호경을 걱정하는 마음에 가려져, 그러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때, 호경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주야! 나 할 것도 없는데 약국에서 일 좀 도와도 돼? 먼지도 닦고, 안내도 하고! 놀면 뭐 해!"

호경의 간절한 목소리에 이주는 망설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이주는 곧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래? 그럼 부탁 좀 할게”

차사들이 그녀의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것이 더 나으리라.

*

도원은 오늘도 팀원들과 함께 반귀령을 쫓고 있었다. 하지만 또다시 코앞에서 놓쳤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상현은 거칠게 부적을 구기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로 자꾸만 사라지는 거야?"

도원의 시선 끝에는 운향원이 있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반귀령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운향원이 반복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은 그의 의심을 깊게 만들었다. 하지만, 성급히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저 안에 우글거리는 형체들, 그리고 그곳에서 새어 나오는 익숙한 냄새는 그의 직감을 더욱 자극했다.

역시나 감이 남다른 홍란도 운향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운영, 지난번에 알아보라던 건 어떻게 됐지?”

조용히 기척을 죽인 채 나타난 운영은 운향약국과 운향원, 더불어 청령의원에 관한 정보를 보고했다. 하지만 홍경제약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아직 홍경제약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듯 그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도원은 운영의 설명을 들으며, 익숙한 이름들이 떠오르자 미묘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역시 그들이 친한 건 이유가 있었군. 홍경제약도 뭔가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데... 운영이 알아내지 못했다면, 정보 관리가 철저한 모양이지.’

“홍경제약과의 관계도 조사해 봐. 이름은 이시운.”

도원은 짧게 지시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흑월만이 저울의 중심인 줄 알았던 그는, 이제 더 많은 무게가 저울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다만 그들이 아군인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일...

“오늘은 그만하자. 더 쫓는 건 무의미해.”

상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또 돌아갑니까? 지금까지 놓친 반귀령들만 해도 한둘이 아니에요. 이러다간 더 많은 이들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어요.”

도원은 상현의 말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확실한 증거 없이 섣불리 들어갔다간 우리 정체만 들킬 거야.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묻어 나오는 망설임을 아는 것은 도원 스스로 뿐이었다. 잠시 망설인 그의 손끝에서 월영의 기운이 잔잔히 흔들리다 이내 가라앉았다.

상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란을 바라봤지만,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이주를 모른 척하는 건 무리야’

결국 그는 등을 돌렸고, 팀원들도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의 발소리가 고요한 밤을 뚫고 멀어져 갔다.

*

"이주야, 뭘 그렇게 봐?"

밖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 이주를 본 호경이 고개를 빼들며 밖을 두리번거렸다.

"밖에... 검은 무리들이 서성이는 것 같아서. 혹시 차사님들이 오셨나 했는데, 아니었나 봐."

이주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흐렸다.

그때였다. 약국 문에 달린 종소리가 거칠게 울렸다.

들어온 것은 분명 망자였다. 짙고 불쾌한 기운이 약국 안을 가득 메우며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얼굴에는 한과 분노가 얽혀 있었고, 그것은 약국 안을 압도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오롯한 자신을 쥐어 짜내듯 힘겹게 다가왔다.

이주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나섰다.

“뭘 찾으시는지 알아요. 잠깐만, 아주 잠깐만 이겨내주세요!”

망자에게 단호히 말하며 그녀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호경아, 넌 빨리 다른 망자들 있는 곳으로 가 있어.”

호경은 멈칫하며 이주의 얼굴을 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몸을 피했다.

이주는 곧 다온을 불렀다.

"다온, 백두산 눈 결정 50, 용담 50, 천궁 30, 백록담 물 50 준비해 줘. 빨리!"

다온은 숨소리마저 급하게 내쉬며 약재를 챙겼다. 이주는 이미 다른 재료들을 섞으며 파르르 떨리는 손길로 향로를 열었다. 곧 약재를 모두 쏟아 넣고 불을 붙였다.

망자는 망설임 없이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힘없이 무릎을 꿇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를 잠식하고 있던 기운이 서서히 사라져야 비로소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망자는 잠시 앉아 있더니 이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앉아서 진정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주가 조심스럽게 권했다.

“... 아닙니다.”

망자는 고개를 저으며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들었다.

“제 기운이 이곳 다른 분들에게 영향을 줄 겁니다. 이제 서서히 줄어들겠지요. 고맙습니다.”

그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는 서둘러 문을 나섰다. 저런 영혼들은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껴 황급히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문이 닫히자 약국 안의 긴장된 공기가 조금씩 풀렸다. 다온이 이주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약사님, 왜 돈을 안 받고 그냥 보내셨어요?”

모두의 시선이 이주에게로 쏠렸다. 특히 영혼들은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이주는 순간 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런 분들은 값을 치른 거나 다름없어. 인간의 욕망보다 더 무서운 게 망자가 갖는 욕망이거든.”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었다.

“망자들은 억울함이나 한을 가진 경우가 많아. 그 고통이 얼마나 무섭냐 하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그저 욕망에 먹혀 악령이 되곤 하지. 그런데 저분은 그걸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눈앞에 놓인 황홀을 누가 쉽게 뿌리칠 수 있겠어? 그 인내를 값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이주의 말에 약국 안은 조용해졌다. 정신없이 몰아쳤던 긴박한 순간을 되짚으며 모두가 그녀의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영혼들은 저마다 생각의 시간이 필요한 듯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평범함을 동경하면서도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잘 해내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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