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경 언니.....?"
시경이 놀란 듯 다가가자 영혼은 가볍게 웃으며 시경의 뺨에 손을 얹었다.
"우리 꼬마, 많이 컸네. 내 모습이 좀 볼썽사납지?"
호경은 이주와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였다.
어린 시절엔 가까운 사이였지만, 중학교 이후 이주를 괴롭히는 무리에 섞여 들었다.
호경이 직접 나선 적은 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듯한 행동과 방관은 이주에게 깊은 배신감을 남겼다.
"어떻게 된 거야...?"
이주는 눈썹을 찡그리며 담담하게 물었다.
"보다시피. 어떤 미친놈이 날 치고 갔는지 길바닥에 누워있더라고"
호경은 털털하게 대답했지만, 그 무덤덤한 태도에 시경의 눈가가 붉어졌다.
어릴 적 이주의 상황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굳이 다른 친구들에게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호경에 대한 복잡한 심경은 자신만의 것이었으리라.
이주의 마음은 구겨진 종이처럼 엉망이었다.
"얘, 울지 마. 이미 죽은 걸 어쩌겠어? 그런데 말이야, 나 크리스천이라 죽으면 천사라도 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안 오더라? 그래서 내 발로 찾아왔지. 여기, 저승사자들 드나드는 곳이라며?"
"그걸 어떻게 알았어?"
이주가 놀라움을 감추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 소식통 몰라? 소문이 파다하던데."
호경은 눈치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 청령의원은 가봤어?"
시경이 묻자 호경은 고개를 저으며 이주를 먼저 찾아왔다 말했다.
"아직, 예전엔 그냥 의사들 집안인 줄 알았는데 죽고 나서 비밀을 다 들켰지 뭐야? 담호오빠랑은 별로 친하진 않지만... 이따가 가서 놀래켜 주려고!"
"거기 오픈 시간 맞추면 줄 엄청 길어. 빨리 가서 대기해야 해!"
시경이 재촉하자 호경은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보자.”
유쾌하게 웃으며 떠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약국 안은 적막이 돌았다.
“언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아니야. 그냥... 마음이 좀 무거워서."
시경의 물음에 이주는 담담히 대답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긴 하지... 언니, 난 이만 가볼게. 호경 언니 약 잘 부탁해.”
문이 닫히고, 그녀가 가져온 약초의 은은한 향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덮었다.
호경의 등장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었다.
지난날의 상처와 함께 휘몰아치는 무질서였다. 번다한 마음을 정돈하려 애썼지만 이미 거세게 흔들려진 마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
운향원은 밀려드는 손님들로 늘 분주했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고된 업무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으나 이곳의 직원들은 경계의 균형을 지탱하는 자신들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노고는 높은 페이라는 형태로 보상받았고, 이는 단순한 급여가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헌신과 희생에 대한 인정이자 감사의 표현이었다.
잠시 후 청령의원의 정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네, 운향원입니다.”
“수영 씨? 청령 정실장이에요. 약사님 통화 가능하세요?”
정실장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잠시만요, 바꿔드릴게요.”
수영이 수화기를 넘기며 이주를 불렀다.
“네, 실장님. 무슨 일이세요?”
이주는 전화기를 들며 물었다.
“약사님, 혹시 반호경이라는 환자 아세요?”
정실장은 옆에 앉은 호경을 힐끗 보며 말끝을 삼켰다.
“네, 제 친구예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요. 다만.. 이분 손목에 바코드도 없고, 진료비를 지불할 수단도 전혀 없어서요.”
정실장이 난처한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래요? 호경이 진료비는 제가 낼게요. 처방전 들려서 보내주세요.”
이주는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수영을 향해 말했다.
“수영아, 반호경이라는 환자가 오면 약값은 받지 말아 줘.”
호경이 아무도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의 처지를 살피자니 자신의 불편한 마음이 옹졸해 보였다.
문이 열릴 때마다 이주는 고개를 들었지만, 들어오는 이들 중 호경은 없었다. 한참 동안 조제에 집중하던 다온이 이주의 모습을 지켜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기다리시는 분이라도 있으세요?”
"응... 내 친구가 왔거든."
짧게 한숨을 내쉬는 이주의 목소리에 다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놀라셨겠어요. 저도 환자들 약국에 들어올 때마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혹시라도 아는 분을 만나게 되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여기선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을 하잖아요."
다온의 말처럼, 이곳에서 일한다는 건 언젠가 한 번쯤은 익숙한 얼굴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곳의 현실은 늘 그런 무게를 동반했다. 그래서 운향의 사람들은 서로를 지탱하며 마음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호경이 들어왔다. 수영은 주변 영혼들의 눈치를 보며 호경에게 말했다.
"약사님께서 말씀하신 게 있어서 약값은 이따가 받을게요."
"약사님, 여기 반호경님 처방전 들어갑니다."
이주는 처방전을 받아 들고 천천히 살폈다. 금은화, 작약, 사슴뿔 도라지... 시경이 가져온 약재를 떠올리며 담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윤실장. 잠깐 얘기 좀."
이주는 잠시 은호를 불렀다.
은호가 다가오자, 이주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따가 반호경 환자... 교통사고로 온 것 같아. 내 친구인데, 겉으론 담담한 척하지만 속은 아닐 거야. 상담 좀 부탁할게."
늘 제 몫 이상을 해내는 그를 신뢰했기에, 이주는 담담하게 부탁을 전했다. 은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더 신경 쓸게요."
"반호경 님"
호경이 이름이 불리자 천천히 창구로 다가왔다.
“네 생각 많이 했는데, 그 안경 아직도 쓰네?”
“탁”
호경의 손길이 이주의 안경 쪽으로 향하자 이주는 반사적으로 손을 쳐냈다.
“너는 이 안경이 추억이니?”
날카로운 말투에 호경이 움츠러들었다.
“미안해... 그때는 어렸었다는 게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너를 미워했던 건 아니야. 용기가 없었어...”
“변명이란 건 잘 알고 있네. 네 마음이 어떻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야. 넌 기회가 많았어. 됐어. 복용법이나 잘 들어.”
이주는 냉정하게 말했다.
“약은 하루 두 번. 자정과 새벽닭이 울기 전에 태워서 향음 하면 돼. 이 약은 네 이름과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영혼은 사용할 수 없어. 복용법만 제대로 따르면 될 거야.”
이주는 차분히 설명한 뒤 덧붙였다.
“그리고 내가 윤실장한테 상담 잡아놨어. 이따가 이름이 불리면 상담실로 들어가.”
호경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꺼냈다.
“근데 이주야... 나 손목에 바코드가 있어야 하나 봐. 난 없거든.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줄곧 담담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불안함이 가득한 눈빛이 이주를 향했다.
물기 어린 시선에 담긴 두려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후... 끝까지 나를 곤란하게 하네. 약국 마감할 때까지 기다려.”
어느덧 약국의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모두가 퇴근한 후, 호경과 이주는 조용히 마주 앉았다.
그들 사이엔 침묵이 흘렀고 그것을 먼저 깬 건 호경이었다.
“이주야, 중학교 때는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철이 없었어.. 내 잘못이 없다고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 애들과 같이 널 생각한 적이 없었어. 나는 늘 네가 그리웠어...”
호경의 사과는 진심이었지만, 이주는 쉽게 마음을 풀 수 없었다. 자신의 상처가 한마디의 사과에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담호가 들어왔다. 그의 등장으로 침묵이 깨졌고, 이주는 담호를 향해 담담히 물었다.
"오빠, 호경이 상태 알려 줄 수 있어?"
이주가 담담히 물었다.
담호는 창구에 기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경이 몸에는 여러 상처가 있었어. 찰과상이나 골절은 물론이고, 열상이 심해서 봉합 시술도 진행했어.”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눈길은 이주를 향할 때마다 부드럽게 머물렀다.
“내가 그렇게 많이 다쳤던가? 하하하.”
호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충 옷에 문질렀지만 웃음 뒤로 떨리는 손이 눈길을 붙잡았다.
“그래. 그런 상처는 교통사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야. 기억나는 건 없어? 사고 순간이라든가... 그 외에 다른 거.”
호경은 잠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몸이 아팠던 거, 바닥에 누워있었던 거? 그 정도. 딱히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아. 기억을 못 해서 못 가는 걸까?”
그녀의 말엔 어딘가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 낙담이 고스란히 이주에게 전해졌다.
“아까 약 먹었지? 통증은 좀 어때?”
이주는 전보다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그녀의 말투에 담호가 고개를 돌려 이주를 바라봤지만 이어진 호경의 말에 이내 시선을 거뒀다.
“임이주 약 최고야! 이제 하나도 안 아파!”
담호가 빙긋 웃으며 호경에게 질문했다.
"다행이네, 그런데 그것보다... 손목에 바코드가 없던데?”
“7개의 바코드? 난 없는데...?”
“망자가 죽으면 손목에 7개의 바코드가 생겨. 이건 망자가 이승에 남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해. 정확히는 7일이지.”
그의 목소리엔 설명하는 이의 확신과 조심스러움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담호가 말에 이주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건, 네가 이승에 머무는 시간에 기약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 바코드가 없는 망자는 시간을 카운트할 수 없으니까.”
“그럼... 원래는 7일이 지나면 저승으로 가야 하는 거야?”
“맞아. 바코드가 소멸하는 시간 동안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고, 필요한 경우 우리 같은 청령의원이나 운향원에 와서 상처를 치료받기도 해. 네가 오늘 약을 처방받은 것처럼 말이야. 그 대가는 보통 금붙이, 장지돈, 아니면 손목의 시간이 되겠지.”
호경은 그들의 설명을 듣고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 고개를 살짝 들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건...”
“네 장례가 아직 치러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그들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처럼 무거운 공기가 약국 안을 가득 채웠다.
호경은 말없이 의자에 앉아 눈을 내리깐 채 깊은 생각에 잠긴 사이, 담호와 이주의 시선이 씁쓸히 마주쳤다. 담호는 짧은 미소로 이주를 위로하듯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오빠가 말한 교통사고랑 관련이 있을까?”
호경은 작게 중얼거리며 질문했다. 그러나 아직 드러난 것도, 확실한 것도 없었다.
그녀는 한동안 노란 등불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자꾸 여기 있고 싶어질까 봐. 걱정돼.”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억누를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등불 아래 비친 그녀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
이주는 방 한구석 책장 아래 깊숙이 놓여있던 낡은 종이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 담긴 추억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부서진 안경과 어릴 적 호경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가득 쏟아져 나왔다.
이주는 한동안 편지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쿡쿡, 맞아. 이런 일도 있었지...”
가볍게 웃으며 한 장 한 장 펼쳐보던 그녀는, 어느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편지 속에는 유쾌하고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의 호경과, 세상 모든 고민을 편지 한 장에 담아내던 자신이 있었다. 낯설면서도 따스한 추억의 조각들이 마음 한편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한참을 추억에 잠겨있던 이주는, 서서히 밝혀오는 새벽하늘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부리나케 상자를 닫으며 다시 책장에 밀어 넣고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은 그녀의 얼굴엔 알 수 없는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이미 오래전 호경을 용서했던 자신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