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걷기로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틈바구니에 끼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꽤나 불편한 감정으로 다가왔기에,
언제부터인가 가깝다는 핑계로 걷는 것을 선택했다.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자, 새벽에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르며 그녀의 마음은 다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남자는 이 일을 스스로 선택한 걸까?’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궁금증이 뒤섞이며 손바닥에 차가운 땀이 맺혔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기분을 조금씩 털어내주는 듯했다.
어디선가 달큼한 붕어빵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 이건 참을 수 없지.’
이주는 혼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붕어빵 트럭이 보였다. 노릇하게 익어가는 붕어빵의 모습과 달콤한 냄새가 그녀의 발길을 붙잡았다.
이주가 결제를 기다리던 중, 무언가가 시야 한쪽을 스쳤다.
사람들 사이, 얇은 옷을 걸치고 작은 가방을 멘 어린 영혼이 서 있었다.
아이의 시선은 붕어빵에 고정되어 있었다. 영혼은 붕어빵 냄새를 따라 움직이는 듯했지만, 허공에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허공을 휘저은 끝에, 아이는 풀이 죽어 고개를 떨궜다.
이주는 고개를 돌리며 옮기던 걸음은 어느새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전에 은호가 말했던 아이겠지.’
잠시 망설이다 화단 위에 붕어빵 하나를 조용히 올려놓았다.
"아이들은 대개 단순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운이 멀찍이 서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떠나는 순간까지도 따뜻했던 기억 하나쯤은 붙잡고 싶거든. 저 아이에겐 붕어빵이 그런 기억이겠지."
"시운아! 여긴 웬일이야?"
"수호한테 가는 길에 네가 보여서. 같이 가려고."
시운의 말을 들으면서도 가라앉은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너의 마음은 전달됐을 거야. 하지만 그 아이가 이곳을 떠날 준비가 됐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지."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며 화단 위에 남은 붕어빵을 바라봤다.
"우린 모두 저 붕어빵 냄새 같은 걸 쫓으며 살고 있어. 냄새는 달콤한데, 잡으려고 하면 사라져 버리는 것들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묵직한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붕어빵 냄새가 바람에 실려 퍼지는 사이, 시운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자."
그는 가볍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주는 그의 말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차분한 태도는 위로가 되었다.
‘이제 정말 신경 끄자. 다 이유가 있겠지.’
청령의원의 불은 이미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담호와 수호가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운이랑 마이쮸! 같이 웬일이야? 벌써 오픈하려고?"
담호가 반가운 듯 손을 흔들며 웃었다.
"어! 뭐 들고 온 거야?"
이주는 봉투를 흔들며 자리로 다가갔다.
"오다가 샀어. 다들 먹으라고. 정실장님도 계시네? 오셔서 같이 드세요!"
정실장은 의약품 리스트를 살피다 이주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기색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지만, 여전히 단정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약사님, 오셨어요? 시운상무님도 오셨네요?"
그는 둘을 향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타이밍 완벽하네! 간식 먹고 싶었는데. 역시 우리 마이쮸"
담호는 환한 웃음과 함께 이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수호는 그런 담호의 행동을 못마땅한 듯 커피를 더 내린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장님 제가 내려올게요. 제 것도 가져올 겸."
정실장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 네 감사해요 정실장님, 그럼 부탁드릴게요"
"마이쮸 안경 바뀌었네?"
"아, 어제 실수로 떨어뜨려서 밟아버렸어. 흐흐."
"아휴, 조심 좀 하지!"
커피를 내리고 돌아온 정실장과 함께 모두 둘러앉아 커피와 붕어빵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그리웠는지 미소를 머금었다.
정실장은 대화 중인 이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주도 느껴지는 시선에 정실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실장님 혹시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아니요, 약사님. 그저... 참 예쁘셔서요. 반짝이는 눈에, 오뚝한 코, 하얀 피부까지. 정말 부러워요."
뜻밖의 칭찬에 이주는 당황한 듯 안경을 추켜올리며 웃었다.
"정실장님이야말로 저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그렇죠?"
그녀는 옆에 앉은 담호와 수호를 향해 물었다.
"아련이라는 말, 아세요? 약사님 보면 그 단어가 떠오르더라고요."
정실장은 이주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이주는 알 것만 같은 단어에 아는 척을 하려다 정확하게는 몰라 들어는 봤지만 정확한 뜻은 모른다고 말했다.
"아련? 눈을 슬며시 뜨고 아련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 그립다는 비슷한 말 아닌가?"
수호와 시운이 번갈아가며 말했다.
"아련(雅然)이 그런 뜻도 있지만 품위 있는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해요. 제가 엄청 좋아하는 단어인데, 약사님께 딱 어울려요."
정실장의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새롭게 알게 된 단어의 뜻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내 수호가 장난스레 던졌다.
"정실장님, 이주한테 약점 잡힌 거 있으세요?"
이주는 수호를 발로 툭 차며 반박했고, 수호는 그런 이주를 보며 엄살을 한 것 부렸다.
한바탕 웃으며 정실장과의 대화가 끝났음에도 그녀의 눈길은 아직 이주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주는 슬쩍 눈길을 돌리며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곧 어제의 강도 사건이 떠올라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바꿨다.
"어제 진짜 웃긴 일이 있었어 큭큭"
이주는 웃음을 터뜨리며 스타킹 강도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스타킹을 쓴 강도가 나타났다고? 혹시... 옛날 영화 보고 영감 받은 망자 아니야?"
"요즘엔 그런 거 안 쓴다고 말 좀 해주지 그랬어."
친구들이 답답한 듯 농담을 던졌다.
웃음소리로 가득 찬 시간이 지나자, 담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요즘 약국 일 어때? 많이 힘들지 않아?"
"괜찮아. 근데 오빠가 주말에 좀 쉬어준다면 더 좋겠지?"
"미안. 본의 아니게 힘들게 한 게 나였네?"
담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이 시간은 소중했다. 복잡했던 마음은 뭉근하게 풀려갔고, 달콤한 팥소처럼 속을 채우듯 큰 위로가 되었다.
*
정실장은 이주를 보며 늘 자신의 딸을 떠올렸다.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와 비슷한 또래가 되었을 것이다. 이주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잊고 살았던 과거가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정실장은 오래전 딸을 데리고 청령의원에서 진료를 받았었다. 밤이 아닌 낮의 병원에서 말이다.
당시는 장담호와 장수호의 아비가 아닌 그들의 백부가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자녀들은 영적 능력이 없어 청령을 이어받지는 못했다.
"아, 안타까운 일이 아니던가? 어쩌면 다행이라 여길지도..."
정서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때도 운향약국이 있었지..."
영감이 유독 예민했던 서경은 그녀를 이끈 목소리에 의해 이곳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청령과 운향의 비밀을 말이다.
결국 딸은 병을 고치지 못했고, 자신의 곁을 떠났지만, 이주를 보며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채웠다.
서경은 자신의 딸을 이주에게 투영한 채 그녀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
약국으로 먼저 돌아온 이주는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 이현과 마주쳤다.
"누나, 벌써 왔어?"
이현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응. 어제 서류 정리 못 한 거랑, 홍경에 약재 발주 넣을 게 있어서."
이주는 들고 있던 붕어빵 봉투를 내려놓았다.
"지금 가는 거야? 붕어빵 사 왔는데, 좀 먹고 가지."
이현이 손짓하며 권했지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나 저녁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도 말고, 도와주지도 말고. 알았지?"
이현은 웃으며 이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조심히 가."
맑은 종소리와 함께 이현은 문을 나섰다.
이주는 걸어가는 동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현의 평범한 일상이 왠지 선명히 다가왔다. 그와 대조되는 자신의 모습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때는 동생보다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선택 되어진 선택은, 자신의 의지인 듯 아닌 듯 평범한 일상을 훔치고 싶다는 갈망이 요동쳤다.
이주는 옷을 정리하고 어제 못다 한 일을 시작했다. 매출과 처방전을 정리하고 약재를 꼼꼼히 살폈다.
홍경에 약재 발주를 넣고, 꺼진 제등에 빛과 기운을 채우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려 하자, 잊으려던 기억이 다시 슬며시 떠올랐다. 머릿속에 맴도는 검술의 움직임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왜 하필 여도원이 떠오르는 거지..."
이주는 무심코 중얼거리며 손을 멈췄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그녀를 열여덟의 어느 여름날로 끌어당겼다.
고2의 여름,
이주는 약대를 목표로 고군분투하며 책과 씨름하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그날은 홍경고등학교의 새 하복이 처음 등장한 날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홍경제약이 재단인 이 학교는, 디자이너인 시운의 엄마가 하복을 새롭게 바꾼 덕에 학생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당시 세련된 디자인의 하복은 주변 학교까지 화제가 됐던 기억이 생생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지?"
이주는 거울을 보며 활짝 웃었다. 새 하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각도로 살펴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점심시간. 친구들과 식사를 마친 뒤 남은 시간 동안 이주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최근 입고된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군가 빌려가기 전에 먼저 확보하려던 참이었다.
"분명 여기 어딘가 있을 텐데…"
이주는 서가를 이리저리 훑으며 책을 찾았다. 한참을 찾은 끝에 책이 꽤 높은 곳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고, 발판을 가져올까 고민했지만 서둘러 까치발을 들어 손을 뻗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손끝이 책에 닿을락 말락 한 순간, 달콤한 향기가 스쳤다. 그리고 하얗고 긴 손이 그녀의 손을 스쳐 지나가며 책을 가볍게 뽑아갔다.
"어?"
감사의 말을 전하려 뒤돌아봤지만, 책을 가져간 사람은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억울한 마음에 빠르게 걸음을 옮겨 그를 쫓았다. 북카트 앞에 선 그는 책을 내려놓고는, 무심한 듯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여도원?’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주는 문득 그의 귀가 붉어진 것을 보았다.
그때부터였다.
이주의 마음 한구석에 여도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운향원 덕에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은 것도 말이다.
이주는 자신의 두꺼운 안경을 고쳐 썼다.
‘이 안경을 다시 쓰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먼지 쌓인 지난날의 감정이 어딘가 가슴속에 남아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맑은 종소리 들렸다. 오랜 기억의 잠식에서 깨어난 듯, 잠시 멈춰 가슴의 저릿함을 추슬렀다.
"언니 있었네? 이현 오빠는?"
시경이 밝은 목소리로 박스를 들고 들어왔다.
"시경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이현이는 퇴근했고, 시운이 지금 청령의원에 있는데?"
"약재 때문에 왔지. 이따가 볼 일이 있어서 지금 들렀어. 그런데 이 오빠, 정말! 그래서 나랑 같이 안 간다고 했던 거구나?"
시경은 창구 데스크 위에 박스를 내려놓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수호한테 볼 일이 있다고 하던데?"
"그럴 리가~ 그건 핑계지, 핑계. 이번엔 우리 차례인 걸 모두가 아는데."
시경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박스를 열었다.
"자, 지난번에 발주한 얼음골 사슴뿔 도라지 가져왔어. 캐느라 손이 얼마나 얼어붙었는지 알아? 더구나 사슴들이 내가 도둑이라도 된 것처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더라니까! 오빠한테 같이 가자고 했는데, 일이 있다며 나만 보냈다고오!"
시경은 손을 들어 보이며 부들부들 흔들었다. 손끝이 빨갛게 얼은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말 고생 많았어. 이 귀한 걸 이렇게 구해오다니 역시 우리 시경이야!"
이주는 박스를 열어 약재를 확인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근데 세 뿌리밖에 못 캤어. 요즘 찾기가 정말 어렵더라. 그래도 꽃까지 잘 보존해서 가져왔어. 나, 잘했지?"
"그럼! 약초꾼 하면 이시경이지. 어서 손 좀 녹이고, 약초꾼 나으리께 생선 한 마리 대령하겠나이다!"
이주는 붕어빵 봉투를 열어 시경에게 건넸다.
그때, 운향약국의 문이 열리며 낯선 바람이 안을 훑고 지나갔다. 고요한 가운데 은은한 기운을 품은 영혼이 약국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운향원을 오픈하지 않았는데... 왜 여기에?’
이주는 영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경도 문 쪽을 바라보며 잠시 멈칫했다.
"이주야, 오랜만이다. 시경이도 다 컸네?"
맑고 익숙한 목소리가 아는 체를 해왔다 이주는 눈을 크게 뜨며 낯선 영혼을 바라봤다.
'누구...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