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세계의 법칙

by 차희의 유희

문이 열리자 어둠 속으로 빛이 퍼져 나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영혼들은 잠시 머뭇거리며 한 발 한 발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날씨에는 유독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희미한 형체로 존재했다. 그들은 곧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빛에 끌려왔다.

흐릿했던 형체들은 빛 속에서 점차 선명해졌고,

손끝과 옷자락,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며 그들의 존재는 조금씩 안정감을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온 영혼들은 접수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 중 몇몇은 조심스레 주머니나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꺼냈다.

모두 청령의원에서 발급받은 처방전이었다.

수영은 통역기를 켜고 첫 번째 손님을 맞이했다.

"처방전 주세요. 금액은 250,000원입니다. 결제는 현금, 귀금속, 혹은, 시간으로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건 안내문을 참고해 주세요."


[안내문]

「금이나 보석은 시세에 따라 금액이 달라집니다. 물질적 보상이 어려운 경우 시간으로 지불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물질 대비 0.5배로 환산되며, 서명 날인이 필요합니다. 줄어든시간은 손목의 바코드를 통해 확인 가능합니다.」


"이승에서도 돈 때문에 고생했는데! 망할 것들! 다들 돈독이 올랐구만?!"

불만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이승의 블랙 컨슈머처럼, 이곳에도 고성을 지르는 망자들이 있다. 어떤 이는 주머니를 뒤집으며 "정말 더는 없다"라고 절박하게 호소했다.

수영은 기계적인 목소리로 그들의 불만을 받아넘겼다.

"값은 고통에 비례합니다. 싫으시면 가셔도 되세요."

이 말은 그녀가 수백 번은 반복한 문구였다.

수영의 태도는 늘 같았다. 그녀는 망자들의 분노와 체념을 흡수하며 담담히 대응했다.

이주의 시선은 그런 장면에 익숙한 듯 지나쳤다.


김정규라는 이름이 적힌 바코드가 접수대 위 스캐너에 찍혔다.

정규는 주머니를 뒤적이다 반지를 꺼내 들었지만, 손끝이 떨리는 게 마치 그 반지가 그의 마지막 남은 전부인 듯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망설이다 손을 거뒀다.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영은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익숙한 표정으로 계산을 마쳤다.

뒤에 서있던 몇몇 영혼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고, 누군가는 놀란 눈으로 손목을 감췄다.

"시간으로 지불하실 경우,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정규는 안내된 종이에 조용히 서명을 하고 손목의 바코드를 확인했다. 반개의 선이 흐릿해지며 사라졌다.

이제, 남은 남은 바코드는 네 개뿐.

정규는 접수대 옆에 놓인 대기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손목의 바코드를 내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남은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선택이 최선이었다.

이주는 조제실 안에서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체념한 듯 움츠러든 어깨. 정규의 모습은 으레 그런 선택하던 망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젓고 다시 올라온 처방전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을 거칠게 열며 들어선 남자는 머리에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그의 손엔 긴 총대가 들려 있었다.

"꼼짝 마! 빨리 있는 거 다 꺼내! 다들 움직이지 마!"

강도는 정규를 잡아끌며 총을 들이댔다. 대기하고 있던 영혼들도 움츠러들며 웅성거렸다.

총기 따위는 이곳에서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승의 기억은 망자들에게도 지배적이었다.

수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에 입력하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입은 놀라는 척 경악의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강도는 한 손에 쥔 가방을 접수대 위로 던졌다.

"빨리! 당장 넣으라고!"

그가 소리쳤다.

수영은 접수대 아래로 손을 뻗어 장총을 더듬어 잡았다. 그녀는 강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래서... 어디 쏘실 건가요? 여기요?"

수영의 태연한 목소리에 강도는 순간 멈칫했다.

"뭐? 장난하지 마! 이거 진짜 쏜다니까!"

강도는 총구를 그녀에게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수영은 강도를 향해 입술을 비틀어 비웃으며 장총을 들어 올렸다.

"아니면 여기쯤?"

총구에서 날아간 은으로 된 밧줄은 강도의 몸을 단단히 휘감았다.

"이게 뭐야?! 풀어! 당장 풀라고!"

강도는 몸부림쳤지만, 밧줄은 더 단단히 조여왔다.

이주는 조제실에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확인했다.

스타킹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몸부림치는 강도의 모습을 본 그녀는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스타킹 강도라니... 수영, 홍차사님께 연락 좀 해 줘. 저분은 바로 모셔가셔야겠네."

수영은 강도가 떨어트린 장총을 정리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문이 열렸고, 홍차사가 들어섰다.

그의 존재감은 공간을 압도했다.

찬 기운이 안에 퍼지자 영혼들은 저도 모르게 한쪽 구석으로 몰려들었다.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몸부림치던 강도는 홍차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고요한 눈빛으로 강도를 내려다보고는 밧줄을 천천히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자."

스타킹에 가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도의 입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넌 뭐야?! 어디서 반말이야? 이거나 당장 풀어! 경찰이야? 옷은 왜 이래?"

홍차사는 한심하다는 듯 밧줄을 더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넌 이미 죽은 영혼이다. 네 꼴을 좀 보거라."

그 한마디는 불필요한 설명을 모두 삼켜버렸다.

강도의 몸짓은 점점 느려졌고, 약국 안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홍차사의 등장은 공기는 불안정하게 요동치게 했다.

영혼들 중 일부는 무릎을 꿇으며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이… 이 약만 먹고 바로 가겠습니다!"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이주는 조제실에서 고개를 내밀며 이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혀를 찼다.

"홍차사님이 오시면 항상 이런 일이 생기지. 너무 강한 분을 불렀나?"

홍차사는 강도의 몸을 밧줄로 단단히 고정한 뒤 무표정하게 문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약국은 비로소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주는 조제실로 돌아가 다온이 건넨 처방전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

"화산석 가루 양이 너무 많은데... 청령의원에 확인 좀 해 봐야겠네."

그녀는 수화기를 들어 청령에 전화를 걸었다.

"네, 청령의원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받았다. 정실장이었다.

"정실장님, 운향원이에요. 심지선 환자 화산석 가루 용량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처방이 맞는지 한 번 확인해 주실래요?"

이주가 차분히 물었다.

"아, 약사님! 네, 잠시만요."

정실장은 반갑게 인사하며 서둘러 담호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잠시 후 담호의 답장이 도착했다.

"약사님, 심지선 환자 화산석 가루 용량 맞다고 하시네요. 환자분이 산에서 변을 당하셔서 그 부분을 고려한 처방이래요."

"아… 그래요? 어쩐지 덜덜 떨고 계시더라니. 고마워요. 정실장님."

전화를 끊은 그녀는 다시 다온을 향해 돌아섰다.

"다온아, 이대로 진행해 줘. 우리가 괜히 넘겨짚었네."


분주했던 약국도 어느덧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운향원의 하루는 늘 청령의원과 발맞추어 끝났다.

새벽 4시쯤 청령의원이 진료를 마치면, 운향원도 동이 트기 전 서둘러 문을 닫아야 했다.

마지막 손님의 약을 건넨 뒤, 이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손끝까지 쌓인 피로가 전해졌다.

"오늘은 조금 일찍 정리할까?"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따라 몸이 유난히 무거웠던 탓이다.

그녀의 말에 직원들의 눈빛이 번쩍였다.

"약사님, 이런 반가운 말씀을! 대체 얼마 만이에요?"

은호가 상담실 문을 활짝 열며 크게 웃었다. 그의 밝은 목소리에 피곤했던 분위기가 잠시 가벼워졌다.

"그래, 모두 마무리하자. 오늘은 유난히 어깨가 아프네. 몸이 좀 안 좋다."

이주는 어깨를 살짝 돌리며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직원들은 이미 기민하게 정리를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이주의 한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몹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주는 마른 웃음을 지었다.

"너무해..."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리고는 그녀도 마지막 약재들을 제자리에 두기 시작했다.

푸른 새벽빛이 창문을 타고 서서히 퍼져왔다.

이곳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일상이 얼마나 오랜 균형 끝에 세워져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운향원의 간판은 다시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천천히 희미해졌다.

이내, 익숙한 이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운향약국.’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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