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관찰기6
여기까지 온 스타트업이라면 적어도 무지(無知)의 상태는 아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알고 있고, 고객의 반응도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으며, 이제는 전략적인 선택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행의 속도는 나지 않고 조직은 자주 멈칫거린다. 회의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결정은 미뤄지며, 조금이라도 중요한 이슈는 어김없이 다시 대표의 책상으로 되돌아온다.
이 답답한 흐름 속에서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서늘한 사실이 하나 있다. 조직이 느린 이유가 시스템의 부재나 팀원들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바로 대표 자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대표는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슈퍼맨'이다. 회사의 방향, 당장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 갑작스러운 예외 상황, 심지어 제품의 작은 디테일까지 모두 대표의 판단을 거쳐야만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이 구조는 초반에는 매우 효율적이다. 의사결정 단계가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조직이 커질수록 이 효율은 덫이 된다. 조직의 판단 속도는 정확히 대표의 사고 속도에 갇히게 되고, 대표가 바빠질수록 조직 전체의 심장 박동도 멈춘다.
어느 순간 팀원들 입에서 "이건 대표님이 결정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이 습관처럼 나오기 시작했다면, 이미 병목현상은 위험 수위에 도달한 것이다.
많은 대표들이 "내 머릿속에는 기준이 있는데, 바빠서 아직 팀원들에게 공유를 못 했다"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문장으로 정리되어 공유되지 않은 기준은 기준이 아니라 직관일 뿐이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으면 팀은 대표의 표정, 말투, 과거의 결정들을 보며 눈치(Nunchi)를 통해 학습한다. 그 결과 팀은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멈춘다.
내가 판단했다가 틀릴까 봐, 혼날까 봐, 혹은 어차피 대표가 다시 뒤집을까 봐 기다리는 수동적인 조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대표가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을수록 역설적으로 조직의 성장판은 닫힌다.
대표가 병목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권력욕이나 욕심 때문이 아니다. 대부분은 과도한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실패의 책임을 오롯이 혼자 지겠다는 마음, 팀원들을 시행착오로부터 보호하고 싶다는 선의가 그 시작이다.
하지만 그 책임감이 권한 위임으로 이어지지 않고 고인 물처럼 굳어질 때, 조직은 결코 대표 한 사람의 그릇을 넘어설 수 없다. 최종 판단 권한, 방향에 대한 미세한 해석, '이 정도면 되었다'는 품질의 기준 등 대표가 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이 단계에서 대표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이 결정은 정말 내가 해야만 하는 결정인가?" 그리고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이 판단을 팀이 대신할 수 있으려면, 나는 내 머릿속의 어떤 기준을 꺼내어 남겨야 하는가?" 위임의 핵심은 결정 자체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결정의 '기준'을 이식하는 것이다.
조직이 성장할수록 대표의 역할은 바뀌어야 한다.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올바른 판단이 조직 내에서 재현되도록 만드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2025년 11월,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들에게 더 이상 자신이 직접 연례 주주 서한과 총회 연설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후임자 그렉 에이블에게 경영의 키를 넘기면서, 개인의 동물적인 감각이 아니라 판단의 기준과 프로세스가 조직 안에 남아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버핏은 자신의 투자 철학이 문서와 원칙으로 남아 버크셔의 영원한 운영체제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대표의 사고가 문서, 원칙, 기준으로 명문화되어 조직에 흐를 때, 비로소 회사는 대표 없이도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다음 회의에서 팀원들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자.
"만약 이와 비슷한 상황이 다시 온다면, 우리 팀은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할까?"
성장은 더 뛰어난 영웅적인 대표 한 명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성장은 대표의 사고와 철학이 조직 전체에 복제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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