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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기제 - 억압, 나만의 융통성 찾기

너에게 쓰는 편지

by HW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요즘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방어기제'다. 특히 상담 중 언급된 "억압" 개념은 정의만 읽어봐도 재미있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 ensures that what is unacceptable to the conscious mind, and would if recalled arouse anxiety, is prevented from entering into it.
(Wikipedia, Repression)


프로이드가 말한 주요 방어기제 중 하나로,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욕망, 감정, 기억 등등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것을 가리킨다. 억제와 억압의 주요 차이는 자신이 인지하는 가에 대한 여부로 구분하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이 두 개념(어휘)을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하는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저 괴로운 것을 의식 혹은 무의식 적으로 외면하거나 누르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폭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일상에서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생길 때, 이를 무작정 억압하지 않고 어떻게 적절히 발산할 수 있을 지 고민하고 있다. 스트레스를(프로이트의 언어를 빌려 쓰자면 이드와 초자아가 충돌하는 불편함을) 전혀 억압하지 않으려고 하면 사회적으로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전부 억압을 해버리면 그것들이 축적되어 언젠가 다른 형태로 폭발할 수 있다. 나의 경우 신체적 증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여유롭게 표출하면서도 스스로를 잘 유지해 나가는 방식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적절한 발산을 고민하던 중, 문득 "나는 왜 가십뉴스에 무반응할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주변 친구들이 연예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서 본 "유명인의 불륜" 이야기를 할 때, 나는 대부분 반응 없이 넘겨버린다. “그 사람이 바람을 피웠다더라”나 “누구를 험담하고 다녔다더라” 같은 이야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학창시절에도 그랬다. 그 이유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선 그 뉴스가 나와는 직접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가 어찌 됐든, 혹은 그 사람이 정말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대신 화를 낼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혹시 내가 사실은 같이 욕하고 싶은 욕구를 억압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서슴지 않고 험담에 가담하며 일종의 부정적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어질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친구들이 가십 얘기로 열을 올릴 때 "나도 같이 욕하고 싶다"는 욕망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느끼지 못하는 건 내가 이미 그 감정을 무의식 깊이 누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실제로 곰곰이 들여다보면, 내가 가십에 무반응한 이유는 단순한 무의식적 억압이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동조를 피하려는 선택에 가깝다. 가십뉴스가 정말로 사실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고, 만약 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험담의 책임은 누가 지는 걸까? 내가 그 비난 대열에 섣불리 합류하는 것 자체가 찜찜하고, 일종의 죄책감까지 느껴질 것 같다. 한마디로 "사실관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를 마구 비난하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나에게는 꽤나 높은 해상도로 넓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드는 또 다른 질문은, "가십에 동조하는 것이 진짜로 친구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분명 주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험담이나 스캔들 소식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분위기가 있다. 같은 사람을 비판하면 일시적으로 "우리 편"이라는 유대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친밀감이 어디까지나 부정적인 에너지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얼마나 지속 가능할까? 누군가가 험담의 도마에 오르는 순간, 이전에 함께 욕하던 사람들조차 한순간에 또 다른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게 험담의 속성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그런 식의 불안정한 유대감을 얻으려고 굳이 남을 비난하며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싶지 않다.


이처럼 "억압을 피하면서도, 불필요한 가십 동조는 거절하는 태도"는 어떻게 가능할까? 나는 그 해답이 의식적 선택 + 의식적 책임 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억압은 내가 욕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완전히 꾹 누르는 무의식적 방어기제라면, 지금 내가 취하고 있는 태도는 "욕하고 싶은 충동이 혹시 생기더라도, 그것보다 더 큰 가치(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한다. 사실관계가 불분명하면 침묵한다.)를 우선시한다." 라는 의식적 판단에 가깝다. 즉, 적절한 발산을 하고 싶을 땐, 확인되지 않은 루머를 근거로 누구를 비난하기보다는 운동, 취미 등등 더 바람직한 방식으로 내 감정을 풀어내는 게 낫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가십뉴스가 나돌 때마다 이런 태도를 보이면, 주변에서 "너 왜 그렇게 재미없게 굴어?" 라거나 "너도 좀 화를 내 보라"고 답답함을 표할 수도 있다. "가볍게 말하는 건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 는 반응도 종종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서 가십에 동조하는 게 정말 내 인간관계에 큰 이득이 될까? 만약 친구들이 모두 한 사람을 헐뜯고 있을 때, 내가 조용히 있거나 "정확히 모르니 좀 더 지켜보자"라고 말하는 것이 그들과의 관계를 해칠 정도로 큰일이 된다면,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외로움을 감수하더라도 내 방식을 지키고 싶다. 왜냐하면 험담으로 맺어진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지, 또 얼마나 불편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두고 혹자는 "그렇다면 너는 가십을 통해 분노나 스트레스를 터뜨릴 기회 자체를 아예 날려버리는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 가십은 부정적 감정을 발산하는 매우 즉각적이지만 위험한 통로다. 게다가 발산 후에도 불편한 찜찜함이 남기 쉬운 방식이다. 허위 정보일 가능성도 있고,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도 있으며, 나 자신에게도 "내 말에 대한 책임" 이라는 부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 발산과 가십에 동조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지 않는다. 가십 이외에도 얼마든지 불만과 스트레스를 풀 방법이 있고, 적절히 그렇게 발산하는 것이 정말로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넋두리가 길었다. 결국, 나는 억압하지 않되, 발산을 요구하는 바람직한 무언가에 대해, 그리고 억압과 융통성 간의 균형점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무작정 가십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다만,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험담이나 소문에 내가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며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을까?" 하고 자문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굳이 나서서 누군가를 욕하거나, 무분별한 루머를 퍼 나를 이유는 없다" 고 결론을 내린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나는 그렇다. 이런 태도가 때로는 재미없다 거나 냉정하다 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이 만족하고 책임질 수 있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 4년 전 작성했던 개발자의 순리에 대한 글 역시, 실은 기술적 측면에만 국한된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내 삶의 벡터값이 오롯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총합보다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삶에 대한 내용에 되려 가까웠다.


비단 기술적 의사결정뿐만 아니라 주말근무, 야근도 마찬가지다. 이번 일정만 지키자는 생각으로 저녁과 주말 없이 일하게 되면 지금 당장의 일정은 지킬 수 있겠지만 점점 개인의 평균 퍼포먼스는 줄어든다. 반복되면 번아웃까지 찾아오고 더 이상 프로젝트 성공 여부는 우선순위가 아니게 된다. 그러니 타협하지 말자. 우리가 의도했던 결과만 생각하자. 그게 순리의 기본 원칙이다.


돌이켜 보면, 누구나 안 그래도 쌓인 불만을 다른 사람 험담으로 풀고 싶다는 충동이 순간순간 올라올 수 있다.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다만 억압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택해 참는(혹은 다른 방식으로 해소한)다" 는 차이가 중요하다.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불안을 느끼고 있는가? 화가 치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정말 이렇게 풀고 싶은가, 아니면 다른 더 괜찮은 방법은 없을까?"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면서, 불필요한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도 내 내면의 감정들을 적절히 다루려 애쓰고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가십뉴스에 동조하지 않는 일은 내게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라, "내 안의 감정을 무조건 누르지 않고, 더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표출하겠다" 는 의지다. 그 덕분에 "못된 말도 한번 시원하게 해 보는 게 어때?" 라는 사회적 유혹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고, 쉽게 비난 대열에 동조하지 않게 된다. 물론 이런 태도가 완벽할 수는 없고, 때때로는 인간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trade off 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방어기제 중 하나인 억압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무분별한 가십에 동조하는 것을 거절하는 내 태도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맥락에서 만난다. "감정을 건강하게 발산하되, 험담이나 근거 없는 루머라는 부정적 통로는 되도록 멀리하자." 이것이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균형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궁금하다. 앞으로도 이런 마음을 유지해 나갈 때, 나는 어떤 모습의 사람이 되어 있을까? 분명한 것은, 적어도 남을 함부로 끌어내려서 나 자신을 위로하진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오는 약간의 외로움마저도, 요즘의 나는 네가 있기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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