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던 날, 집에서 가까운 곳을 걸어 다녀올 일이 있었다. 거실 창밖을 내다보니 인도에도 눈이 얕게 쌓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여전히 가늘게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가야 할 길목에는 공원이 있었는데, 공원은 택지개발 하기 전 야산이었던 것을 거의 그대로 살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는 굽이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눈이 더욱 두텁게 쌓였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얼마 전 폭설이 내린 날, 동창 모임에서 빠진 사람이 많았던 일이 떠올랐다. 오지 못한 사람들 중에는 눈길에 미끄러져 다친 후부터 눈 오는 날이면 외출을 삼가게 되었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기에,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에 현관에서 등산화를 신고 등산용 지팡이도 챙겼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눈이 많이 오지도 않았는데, 지팡이까지 챙길 필요가 있어?"
현관문을 열고 나오니, 아파트 단지 안에는 물론 공원으로 향하는 길에도 눈이 거의 없었다. 괜한 준비를 한 것 같아 지팡이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오르막길을 지나 공원 안쪽을 가로지르는 길에 들어서자 풍경이 달라졌다. 예상대로 길 위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있었고, 나는 조심스레 발을 내딛으며 지팡이를 힘차게 짚었다.
그때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려왔다. 내려가는 길목에서 눈을 조심스럽게 피해 걷다가, 송풍기를 짊어진 사람과 삽으로 눈을 치우는 사람을 보았다. 공원의 제설 작업을 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지나가며 "수고 많으십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으나, 송풍기의 큰 소리 때문에 내 말이 닿지 못했는지 그들은 바쁘게 작업을 이어갔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이렇게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이들 덕분에 무탈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나는 이 길에서 넘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공기 없이 살아갈 수 없듯이, 그들의 존재가 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런 역할을 했던 시간이 있었고, 지금은 아들이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다.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많이 배우고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눈을 치우고, 불을 끄고, 쓰레기를 옮기고, 버스를 운전하며 우리가 일상을 안전하게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눈길을 무사히 걸어 나와 외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수많은 ‘공기(空氣)’ 같은 존재들에게, 그리고 그들 덕분에 안전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