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제도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지난 글들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사는 회사를 배신하면 안 된다. 자신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이 충돌할 경우 회사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이를 이사의 회사에 대한 충실 의무라 한다.
우리 대법원은 이사의 회사에 대한 충실 의무만을 인정하고,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는 인정하지 않는다.
상법 개정안은 상법에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명문화하여, 이사로 하여금 특정 주주의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결정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입법이다.
이상의 내용들만 보면, 상법 개정안은 합리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특정 주주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못한 일이니까요.
찬성하는 쪽에서는, 이러한 상법 개정안이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결하는 방안 중 하나로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대하는 쪽에서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법인 제도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논거입니다.
풀이하면, 주식회사는 주주와 분리된 실체이고, 이사는 주식회사의 수임인이지 주주의 수임인이 아니므로, 이사가 부담하는 상법상 충실 의무의 대상은 개별 주주가 아니라 회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보면 와닿지 않으니 풀이를 해보겠습니다(관련하여 복잡한 법리와 논의가 있고, 모두 설명하려면 논문 한 편을 쓸 정도겠지만 이 글은 그런 목적으로 작성하는 글이 아니니 간단하게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유한 책임만 부담합니다.
굉장히 당연한 말이지만, 한층 더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개인이 빚을 졌는데 다 갚지 못하면 집도 팔고 차도 팔아야 합니다.
하지만 주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가 100억 원의 빚을 지고 있더라도, 주주가 주식을 100만 원 주고 샀으면 그냥 100만 원만 잃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차별을 두는 이유는, 주식회사 주주의 유한 책임을 법으로 정해 둠으로써 경제 주체들이 보다 안심하고 자유롭게 주식회사에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그로 인해 자본이 모이며, 모인 자본으로 기술과 생산력이 발전하게 되는, 그런 선순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급부가 발생합니다.
주식회사 주주들이 유한 책임을 지는 것은 좋습니다만,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주식회사의 채권자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은행이 주식회사에 돈을 빌려줬는데, 주식회사가 망하면, 은행은 누구에게 돈을 받아야 할까요?
개인의 경우 사회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실체이기 때문에, 계속 살아가면서 돈도 벌고 할 테니 언젠가는 빌려 준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회사는 그냥 망하면 사라지는 존재이고 애초에 실체도 없는데, 회사의 주인이라는 주주들에게 돈을 받아 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법률에서 여러 보호 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이사' 제도 역시 그중 하나입니다.
주주와는 분리된, 별도의 존재로서 오직 회사만을 위해 업무를 수행하는 대리인을 만들어 회사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주주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주식회사를 하나 만든 다음, 회사 명의로 여기저기서 돈을 빌립니다.
그리고 배당을 통해 회사가 빌린 돈을 자신의 계좌로 옮겨 버립니다.
주주 입장에서는 주식회사 제도를 악용하려고 마음먹을 유인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어차피 회사의 부채는 회사의 부채이고, 주주의 부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사는 오직 회사를 위한 대리인입니다.
저런 짓을 했다가는 회사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회사의 자금을 엄정하게 관리하고 오직 회사를 위해서만 자금을 이용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이사라면 말이지요.
이런 배경 하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사가 주주를 위해 일할 의무를 부담한다면, 과연 법인 제도가 잘 유지될 수 있을까요?
이사는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부담해야 하는가?(4)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