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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기행] 흘린 피가 많은 울 동네 산책로

<카바티 숲>, 바르샤바 역사의 반창고

by 흑투리

기본적으로 바르샤바를 여행으로 오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중앙 광장을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것도 길어야 3박 4일까지만 잡고 다른 나라로 가는 식으로. 그렇지만 투리가 있는 곳은 광장에서 도보로 한 시간 거리의 지역, 우르시누프(Ursynów)구. 그저 녹음이 무성한 심심한 곳이다.




하지만 무려 투리에게 의식주와 교환학생 기회를 준 고마운 장소 아닌가? 은혜를 입었다면, 자존심 한 번 세워주는 게 작가로서의 도리! 본인이 혹시 우르시누프에 있는 교환학생이라면, 그나마 분위기 환기상 쉴 만한 장소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여행으로 온 분들은 올 필요까지는 없고, 이성친구한테 뽐낼 유럽 지식 하나 더 늘린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폴란드어를 가르쳐주는 재학생들과 그것을 배우는 교환학생들. 매주 화요일마다 진행되는데, 투리는 이미 일정 과부하 상태라 참여하지는 않는다



교환학생을 지내다보면, 가끔씩 일반인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북적북적한 관광지 말고, 진짜 일반인들만의 장소. 복에 겨운 얘기라고? 홍대병 걸린 사람이라고? 그렇다. 투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의미와 역사가 있는 장소라면, 그 어디라도 들르고 싶은 투리! 여태까지의 글을 보면 느껴지지 않는가? 관계, 관계, 관계의 연속. 그 날은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 일반인들의 찐 휴양지를 찾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찾은 근처 공원이 '카바티 숲(Kabaty Woods)'.



카바티 숲이 있는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본 장면



아직 꽃샘추위가 무성한 3월 12일. 166번 동네 버스를 탄 투리는 버스와 지하철의 종착지, 카바티 숲으로 발을 디뎠다. 관광지 코스프레가 섞인 와지엔키 공원과 달리 올 사람만 오는 찐 휴양지, 카바티 숲. 숨겨진 맛집을 찾고자 하는 투리의 취향에 딱 맞는 곳이다.





조금 더 걸으니, 그림이 그려진 벽과 함께 넓은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개를 산책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확실히 산책용으로는 최적인 장소로 보였다. 숲도 넓으면, 그만큼 개들도 많이 뛰어놀 수 있을 테니까.



카바티 숲 입구


하지만 본인이 그저 산책이나 하려고 구태여 이런 기행글에 카바티 숲을 적은 건 아닐 터. 본인이 이 곳을 소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요지부터 먼저 말하자면, 투리가 보았을 때 이 숲은 '바르샤바의 반창고'라고 생각한다. 숲이니까 당연히 치유의 기능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다. 이 숲에는 폴란드의 여러 역사들이 섞여 있다.



입구 측면의 뻥 뚫린 듯한 이 하늘을 감상하시라.



먼저 '카바티 숲'에 대한 소개부터 하면, 이 숲은 바르샤바 최남단 쪽에 위치한 숲으로, 이름은 비스툴라 강에 있던 카바티 마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 숲의 공식 이름은 '스테판 스트라진스키(Stefan Starzyński)를 기념하는 카바티 숲'이라고 하는데, 스테판 스트라진스키가 누구인가 하고 봤더니 전쟁 영웅이셨다. 바르샤바의 시장이셨는데, 1939년 게슈타포에 체포될 때까지 독일에 맞서 바르샤바를 지키기 위해 애쓴 분이라고 한다.



입구 앞에 있던 카바티 숲의 소개 표시판


어지간하면 바르샤바에 있는 대부분의 장소들은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전적이 있다. 카바티 공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그 가치가 완전히 훼손되지는 않았다. 이 숲에는 120살에서 160살에 육박하는 나무도 있고, 소나무, 석송, 린덴 등의 식물류부터 사슴, 여우, 오소리, 고슴도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동물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종들 중에는 희귀종들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입구에 들어가고 안으로 들어가니, 위 사진과 같이 산책로가 끝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이 이어졌다. 실제로 숲의 넓이는 약 9 제곱킬로미터로, 서울 남산 면적의 두 배가 넘는 크기라고 한다. 이 정도 넓이라면 보통 숲이라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크기이기는 하다.



기울어지게 뻗어 있는 나무 발견.



이제 본인이 이 숲을 반창고라고 표현한 이유를 말해볼까? 이 숲 안에 여러 상흔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 첫 번째 상처는 다들 어느 정도 예상했듯 독일군의 비밀 장소이다. 당시의 폴란드를 통제하고 탄압하기 위해 독일 나치는 대량의 폴란드인들을 살해했다고 하는데, 이 숲도 그 장소들 중 한 군데였다. 그래서 전후(戰後) 조사 결과 이 곳에서 집단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걸으면서 발견한 부러진 나무들의 흔적.



한편 카바티 숲은 폴란드군에게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1932년 말에 폴란드 총참모부 산하의 암호국(Cipher Bureau)이 처음으로 세워졌는데, 1937년에 이 숲으로 장소를 이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에서 독일군의 애니그마 암호 해독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곳에서 폴란드 수학자들이 만든 애니그마 해독 알고리즘이 연합국에게 넘어가서, 앨런 튜닝(Alan Turing)과 같은 수학자들이 더 정교한 해독 장치를 만드는 데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혹시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 영화를 아시는 분 있으신가? 그렇다, 그 영화 속 주인공이 앨런 튜닝이다!



중간중간 반려견과 산책을 하거나 운동하러 나온 분들의 모습도 보인다.



참고로 현재 이 숲 근처에는 폴란드의 공군 작전 지휘 센터도 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숲에 들어가기 전에 접근이 제한된 큰 시설이 한 군데 있었는데, 경비가 다소 삼엄했던 걸로 기억한다. 위 사진처럼 편한 분위기의 숲에 그런 장소가 있던 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는데, 거기가 지휘소였던 걸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한참을 걸은 결과, 이렇게 작은 오두막처럼 지어진 곳이 눈에 보였다. 갔을 때는 몰랐는데, 이 자리는 건강한 생활 방식을 대중에 알린 전직 군인 Antoni Huczyński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숲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늪


너무 넓어서 가지는 못했지만, 독일군에 의해 처형된 폴란드인들과 애니그마를 해독한 폴란드인들의 기념비도 각각 이 공원 안에 존재한다. 그걸 못 본 건 아쉬웠지만, 투리가 찾는 기념비는 따로 있었다.





그 기념비가 위의 두 사진에 나와 있는 기념비인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카바티 숲의 두 번째 상처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숲의 또 하나의 상처는 바로 이 곳이 비행기 추락 사고가 벌어진 지점이라는 것이다.



사고 당시의 사망자 183명의 이름이 기록된 비석.


소위 'LOT 폴란드 항공 5055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폴란드 항공 역사상으로도 가장 비참한 사고로 알려져 있다. 1987년 5월 9일 일어난 이 비극은,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서 뉴욕 존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가는 도중 생긴 두 번째 엔진의 고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기체의 다른 시스템에도 손상을 입히면서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비행기는 카바티 공원에 추락해 탑승자 183명이 전원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비석


이 사건을 계기로, LOT 항공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중대한 개선을 이룬다. 항공사는 노후 기종을 퇴역시키고 서방 기종들로 교체를 했고, 정비 프로토콜과 감독 기준을 엄격히 강화했다. 그 결과 LOT 항공은 현재 세계적으로도 안전도 평가가 양호한 항공사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투리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지만, 해당 사건과 그 후 있었던 LOT 항공사의 대응은 최근 한국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폴란드는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소박하게 십자가와 비석을 두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그 대신 항공사의 안전 강화에 더욱 투자하여 추가적인 사고 예방에 힘썼다. 진정한 추모는 돈이 아닌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한국도 추모식에만 과한 돈을 들일 것이 아니라 무안항공과 제주항공의 안전성 강화, 그리고 실질적인 재난대비 예산 증액을 통해 이상의 사고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희생자들과 유족에 대한 예의이자 진정성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의 희생자들에 대한 짧은 묵념을 마친 후, 투리는 다시 카바티 숲의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이었다. 40분 정도 걸었을까. 오른쪽을 보니, 완전히 탁 트인 들판이 본인의 눈에 들어왔다. 나무들만 빽빽 무성할 것만 같은 곳에 이런 데가 있었을 줄이야.





화창한 날씨도 한 몫했는지, 여기서부터는 커플들도 은근히 많이 있었다. 본인의 친구 한열이도 사진 보면서 나중에 연애할 때 여기 오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 물론 바르샤바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으면 여기가 안성맞춤이긴 하다.





그 중 본인이 보았을 때 가장 압권이었던 순간을 찍은 결과물이 위의 사진들이다. 투리가 보기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숨은 명소를 찾았을 때의 행복감이 바로 이런 순간 아닐까?





재미있게도, 카바티 숲은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조금 더 아래쪽으로 가 보니, 여러 가지 놀이터들과 수영장, 카페 시설들이 보였다. 비록 시간이 없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 곳에는 식물원도 있었다. 본인의 집에 이런 숲이 있다면, 바람 쐬고 싶을 때마다 들릴 것 같다.





그렇게 남은 놀이터를 둘러본 것을 끝으로, 투리의 카바티 공원 기행은 끝이 났다. 막상 갈 때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기행문을 적어 업로드하는 지금 카바티 공원이 얼마나 의미있는 곳이었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역사는 분명 이곳에서 생을 다한 영혼들의 존재를 기록하고 있다. 희귀종도 있고, 다양한 생명체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카바티 숲. 부디 이 숲이 그 분들의 마음도 달래주길 바라며, 이번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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