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옳게 된 투리의 영어 실력

교환학생을 가려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는가?

by 흑투리

벌써 바르샤바 3주 차 기록을 마무리하고 있는 투리. 돌이켜보면, 3월 초까지는 여행보다는 학교생활 적응에 더욱 신경을 썼던 기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여기저기 여행도 잘 가고 있지만, 그때는 감기와 싸우랴, 학교에서 시키는 행정처리 마무리하랴, 이것저것 귀찮은 일도 많았다. 그런데 초반은 늘 다 그렇지 않은가, 딱히 후회는 없다.




혹시나 투리가 여러분에게 아직 꺼내지 않은 내용이 있나 생각해 봤는데, 딱 하나 다루지 않은 주제가 있다. 바로 '투리의 영어실력'. 물론 '모든 유럽인들이 영어를 잘한다는 건 편견이다', '수업할 때 교수님들 발음에 억양이 있다' 등등의 얘기는 했지만, 정작 본인의 영어회화에 관해서는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투리는 영어 걱정이 없었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내고자 한다.





지금부터 다룰 내용은 투리의 지극한 뇌피셜로, 독자가 다소 재수 없게 여길 가능성이 있으며, 해당 감정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지지 않습니다.





조금의 편견인 것 같다만, 본인의 주변에는 교환학생을 간다 하면 대부분은 그 이유들 중 하나가 영어실력 향상이었다(일본어권, 중국어권 교환학생 제외). 이건 작년에 먼저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간 아는 누나도 그랬고, 본인과 같은 학기에 교환학생을 간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겨울에 그 후배가 했던 말이 있는데, 자기가 옆에 있는 또래 동기처럼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참고로 그 또래 동기는 뉴질랜드에서 장기간 거주한 경력이 있는 후배다).



3월 1일 있었던 학교 OT. 폴란드의 역사 배경을 소개하는 중이다.



이렇듯 영어 회화는 교환학생을 간다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과제인데, 투리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놀랍게도, 아무 생각 없었다. 회화 연습? 독해 훈련? 걱정은커녕, 토플 시험 이후로 최소한의 영어공부조차도 안 했다. 오히려 일본어와 중국어 공부에 빠져서, 주변에서 폴란드 준비는 안 하냐는 핀잔까지 들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가? 솔직히 말하면, 그때 영어공부가 크게 당기지 않았다. 어차피 폴란드는 폴란드어를 쓰는데, 폴란드어를 따로 배우지 않는 이상 의사소통이 될 정도의 영어실력만 있으면 장땡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투리는 본인이 그만큼의 실력은 된다고 자부했다. 예전에 가끔씩 랜덤채팅을 돌렸었는데, 그때마다 상대가 본인의 영어실력이 좋다고 칭찬해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어능력의 거의 모든 영역을 측정하는 TOEFL에서 일정 이상의 점수가 나왔기에, 어지간하면 영어 사용에 큰 하자는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게 비영어권 국가라면 더더욱.



기숙사 침대에서 먹은 간단한 한 끼를 찍은 사진


그런 의미에서 투리는 교환학생을 가려는 주목적을 영어실력 향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본인은 오직 유럽 장기생활에 대한 환상만 가득했을 뿐이었다. 설령 언어 걱정을 하더라도 상대방 쪽에서 영어가 안 되면 어떡하나 하는 게 다였다.



펍 활동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면서 찍은 사진.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럴 때는 보통 '내 생각이 틀렸다'라는 전개로 흘러가지 않는가? 하지만 노노. 너무 뻔한 클리셰이다. 글에 신선도를 가미하기 위해, 본인은 '나름 맞았다'라는 답을 내리겠다. 진짜 재수 없다고? 미안하다! 하지만 거짓말로 억지 반성을 짜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투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어달라. 여러분도 어느 정도 납득할 것이다.



학교 근처 케밥집 안.


일단 교환학생을 간다면, 여행을 갈 일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런데 누차 말하지만, 어지간하면 평범한 유럽인들에게 서비스를 요청하는 데 그렇게 탁월한 영어가 요구되지 않는다. 설령 요구된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니까.




이건 실제 사례인데, 독일과 중국을 여러 차례 오간 본인의 지인 후배가 있다. 이 친구 말로는 회화 실력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데, 기본적인 단어와 몸짓으로도 의사소통이 꽤 가능했단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교환학생을 준비한다는 사람이 그 정도로 회화가 처참하면 안 된다. 투리 말은, 영어실력이 일정 수준 이상만 되면 언어 능력이 소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단, 영어권 국가 제외)



학교 광장에 모인 신입생들.


그리고 이건 각자가 속한 학교에 따라 다르지만, 본인이 맘먹고 한국 사람들 위주로 만난다면 영어를 생각보다 많이 안 쓸 수도 있다. 투리의 학교는 현재(2025.4.14) 기준 마주친 한국인이 총 네 명으로,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독일의 어떤 학교는 한국인이 20명을 넘는다고 한다. 그런 경우 한국인들끼리 몰려다니면 상대적으로 다른 언어를 쓸 필요성이 줄어든다. 투리 개인적으로는 그걸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만.



한 수업의 OT에서 교수님이 추천한 책



아, 그렇지만 투리가 외국에 와서 잘못 생각한 것들도 많다. 분명히 영어가 꼭 현지인만큼 능숙할 필요는 없지만, 정작 본인도 영어가 그리 능숙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다. 영어로 얘기를 하니까, 순간적으로 말이 막히는 경우들이 가끔 있었다. 모국어인 한국어의 문장 구조가 확실히 영어와 다르다 보니, 갑자기 영어를 쓰면 말이 꼬이는 경우가 생긴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다면, 투리만 그런 것은 아니고, 상당수의 교환학생들도 비슷한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교환학생들 중에서도 영어를 현지인인가 싶을 정도로 능숙히 구사하는 동기들은 분명히 있다. 같은 세면실을 공유하는 카자흐스탄 친구가 딱 그런 동기였는데, 이 친구는 수업에서 진행되는 학문적인 내용설명도 굉장히 잘 표현한다. 못해도 영어 구사도 자체가 투리보다 두 수 위다.



'The Screwtape Letters'의 94, 95페이지



최근에도 본인의 영어실력이 아직 부족하다는 걸 깨달은 계기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독서토론 때였다. 위 사진은 C.S.Lewis가 지은 'The Screwtape Letters'라는 책의 페이지인데, 한 번 집중하고 저 페이지의 내용을 읽어보시길. ..........어떤가? 이해가 되는가?



솔직히 말하면, 저 책을 보고 그렇게까지 내용 파악이 안 된 적은 수능 고난도 지문 이후 처음이었다. 충격적인 점은, 주변 영어 구사자들은 어렵지 않게 그 책에 대한 얘기를 잘 이어가고 있었다. 그분들이 책의 내용을 풀어서 설명했는데도 투리는 대화를 100%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학생의 자율 발표 시간.



비단 독해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또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투리는 학생이나 교수님의 수업을 한국어만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걸 교환학생 6~7주 차가 되었을 때쯤 인지하고 말았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화자의 말이 안 들린다. 특히 상대방의 모국어 억양이 강하게 느껴질 때 그렇다. 그래서 가끔 교수님이 '이해하셨죠?'라고 말씀하시면, 본인은 겉으로는 의연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안절부절못한다.



학교 실험실 징면


이런 누수들이 있는 탓일까. 가끔 가다 다른 나라 동기와 대화를 하다 보면, 꼭 한 번씩은 'What?' 'Say that again?'이라는 말을 듣는다. 해당 동기도 자신의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니 이해를 바로바로 못하는 점도 있겠지만, 투리 본인의 발음 문제도 여기에 한몫한다고 본다. 오죽하면 본인도 본인 영어에 한국어 발음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겠는가.





정리하면, 투리는 아래의 세 가지 사실을 통해 메타인지 능력을 키웠다.


1. 투리는 영어회화가 상대적으로 유창하지 않다.

2. 투리는 영어독해능력이 그다지 빠르지 않다.

3. 투리는 영어 수업 이해능력이 생각보다 떨어진다.



그래도 투리 정도의 영어실력이라면 다른 교환학생들과 친해지고, 박물관의 영어 설명문을 읽고, 학교생활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본인은 그저 네이티브에 유사한 실력이 아니었을 뿐.






그래서 조금 웃긴 얘기다만, 다른 한국 교환학생들은 외국에 갔다 와서 본인의 영어가 확실히 늘었다고 말하지만, 투리는 오히려 본인의 영어가 퇴보된 느낌이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여기 와서야 제대로 자기객관화가 되었기 때문이겠지. 본인의 영어실력이 정체구간이라 실력상승 체감이 안 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상이 투리의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이 가득한 영어 경험담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현실에서 깨져버린, 일종의 투리 정상화 과정을 서술한 글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그럼에도 투리보다 영어실력이 떨어져서 교환학생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꿈나무들도 있을 것이다. 이 걱정에 대한 투리의 답은 한결같다. 그래도 가면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당신이 한국인들끼리만 뭉쳐 다니든, 교환학생 학교 도시에만 있든, 그럼에도 한국에서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는 반드시 배운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영어실력이 그 몸짓과 기본 단어로만 소통하는 지인 후배보다는 나을 것.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