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적응 안 되는 폴란드 파티 라이프
이름부터 조선 시대의 캐릭터에서 따온 본인, 흑투리. 이런 보수끼가 가득한 투리가 한국에서 안 좋아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의미 없는 술자리.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동호회거나, 같은 미래를 도모하는 사회 구성원들끼리 우호를 도모하는 자리는 예외로 둔다. 예를 들면 전통적으로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중학교 동아리 친구들과의 홈파티, 같은 크리에이터로서 활동하는 유한열과의 빈번한 접촉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그냥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취하고 노는 게 즐거워서 자주 술자리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다. 술자리를 통해서 답답함을 풀어야, 그것을 동력 삼아 일상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좋아하는 것들은 각자마다 다르니 그런 취향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마음은 없다. 다만 본인은 확실히 그분들과는 성향이 다른 것 같다. 투리는 만남을 정할 때 미래를 생각한다. 본인에게 잠재적 이득이 있거나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만남이 아니라면, 그 만남은 그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본인과 특별한 명분이 있는 게 아닌데도 투리가 자주 나와주고 있다면, 그건 투리가 그만큼 당신과의 의리를 위해 희생해주고 있다는 말이니 무조건 감사하도록.
하지만 그동안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폴란드로 오니, 초기에는 대부분의 활동이 본인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하던 문화가, 외국에서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순수히 궁금했던 것이다. 그것은 술자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애초에 한국과는 다른 나라의 일이니, 별생각 없이 가도 최소한 콘텐츠 썰감으로는 활용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은 우리 학교 학생회에서 주관한 유흥놀이, 술놀이 후기를 좀 털어놓고자 한다.
가장 먼저 언급할 이벤트는 2월 28일 진행했던 'Just Dance' 파티. 이 날이 전 글에서 언급한 <노비 쉬비아트> 거리를 방문한 그날이다. 어느 정도 볼 걸 다 보고, 나는 바로 학교 파티에 참석하러 갔다. 이제까지 그랬듯, 만나기로 한 펍은 학교 건물 안에 있는 그 펍이었다.
펍 안에 들어가 보니, 학교 이벤트 때마다 거의 함께하던 핀란드 동기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있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했고, 간단히 근황을 물었었다. 동기 말로는 데이팅 어플을 켜서 현지 남자를 만나봤는데, 본인과는 안 맞는 느낌이 강해서 앞으로 안 만날 거란다. 애초에 투리가 듣기에도 그 동기 누나랑은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투리도 잘했다고 대답했다. 이런 걸 보면 투리도 나이를 중시하는 한국문화에 너무 절여져 버린 것 같다. 다른 나라라고 나이를 안 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10살씩이나 차이가 안 나는 이상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외국생활에서 크게 느낀 장점이 이것이다. 한국과 달리, 여기는 나이에 따른 무게감과 제약이 덜하다.
아무튼 시간이 지나고, 나머지 한국 동기들도 차츰 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기숙사 한국인 동기의 버디도 펍에 들어왔다. 그 외에도 카자흐스탄 동기들, 인도네시아 동기들, 다양한 동기들이 그 자리에 참여했다. 이 때는 초반이기도 하고, 밤에 진행되는 파티이다 보니 상당히 많은 교환학생 동기들이 왔었다.
펍 안에 들어가면, 위 사진과 같이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이전 글에서 언급한 가라오케 행사 등 많은 이벤트들이 진행되는 장소이다. 이 날의 행사는 댄스파티. 프로젝터를 보면 'Just Dance' 리듬게임 화면이 보일 것이다. 투리와 같은 세대라면 초등학교 시절에 Nintendo Will 광고에서 Ke$ha의 'Tik Tok'에 맞추어 춤을 치는 여자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텐데, 그게 저 게임이다.
댄스 신청자는 팀 혹은 개인으로 참여해서 'Just Dance'에 수록되어 있는 곡들 중 하나를 선택한 다음, 영상 속 게임에 맞추어 춤을 추면 된다. 참고로 게임 속 수록곡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Y.M.C.A', 2010년 월드컵 주제곡 'Waka Waka', 심지어 한국 노래 '강남스타일'까지 다양하다. 춤이 끝나면 위 사진 속 프로젝터 아래 소파에 앉아 있는 재학생들이 점수를 매긴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저렇게 다양한 학생들이 즉석에서 팀을 만들어 춤을 추었다. 특히 저 무리 중에는 팀을 중복해서 신청한 걸로 의심되는 학생들도 있었다. 투리가 관심이 있게 방 안을 보니, 다른 한국 동기들이 본인을 보면서 혹시 춤출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다. 사실 나는 춤을 출 의향이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난 나중에 바르샤바 Kpop 클럽에 가기 위해 미리 예행연습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사귀려면 어느 정도 노래에 적응하면서 적극적일 필요는 있다고 해서, 이 기회에 용기를 먼저 내보고 싶었다.
(원래는 본인이 춤추는 사진이 있어야 하는 자리)
그렇게 해서 본인이 고른 곡은 ABBA의 'Dancing Queen'. 비록 춤과 연은 없으나, 마음만은 춤의 여왕이라는 쓸데없는 비장미 속에 고른 음악이다. 당시 본인은 아예 각을 잡고 블레이저와 흰 와이셔츠까지 입고 있던 상태였어서(오기 전에 댄스파티가 탱고 같은 격식 있는 춤인 줄 알고 그렇게 입었었다),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본인이 우아한 컨셉 잡고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영상을 확인해 봤는데, 보자마자 그 영상을 핸드폰에서 깔끔히 지웠다. 투리에게는 도저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영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국 동기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모습을 못 본 것을 아쉬워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본인은 또 하나의 흑역사를 막은 것만으로 만족한다. 결론적으로 그날의 파티는 본인이 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 재확인시켜준 채 끝이 났다.
시간이 흘러 다음 주 화요일, 이 날은 또 다른 행사가 진행되는 날이었다. 행사의 이름은 'Join the Pubcrawl'. 투리가 알기로는 펍에서 여러 가지 미니게임들을 하는 그런 이벤트였다. 당시 본인은 추운 2월에 과하게 밖으로 나가서 감기가 좀 심한 상태였다. 가지 말까 고민을 했지만, 금방 나갈 수 있겠거니 생각하고 학생들이 있는 곳에 모였다. 결과부터 말하면, 그 생각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펍에 먼저 들어갔을 텐데, 갑자기 파티 주최 재학생이 원으로 모여달란다. 이때부터 뭔가 안 좋은 느낌이 감지됐다. 주최 측은 학생들한테 돌아가면서 1번부터 6~7번(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 남)까지 순서대로 종이를 뽑게 한 다음, 해당 번호끼리 조를 짜게 했다.
본인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1번 종이를 받고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1번 팀이 모인 곳으로 가니, 사진 오른편의 여자분이 선글라스를 낀 본인의 얼굴 스티커를 팀원들에게 부착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팀의 팀장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중간에 나갈 수 있겠거니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 행사의 메인은 음주인데, 본인은 건강상 알코올류 음료를 아예 마시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충 게임의 룰은 주최에서 요구하는 미션들을 달성하는 건데, 어떤 미션은 같이 보드카 한 잔을 원샷하는 거고, 어떤 미션은 정해진 장소에서 돌아가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못 마시는 사람들을 향한 배려까지 생각했던 것인가, 따뜻하게도 팀장은 본인에게 달걀 하나를 건네면서 그걸 게임이 끝날 때까지 안전히 지켜달라는 미션을 주었다. 큰일 났다. 난 이제 빼도 박도 못하고 끝까지 남아있어야 한다.
그 와중에 미션들 중에는 음주와 관련 없이 경찰차를 찍는 미션이나 커플의 키스 장면을 찍는 미션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자의 미션은 꽤 신박했는데, 주변에서 이따금씩 술 마시고 서로 키스 한 번 해볼까 하고 얘기가 오갔다.
"키스, 키스...?"
투리는 감기가 좀 심했어서, 혹여라도 키스 제안이 들어온다면 전염을 핑계 삼아 빠져나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당연히 위 대화도 농담으로 하는 말일 거고. ㅋ.ㅋ
일단 다 같이 보드카 원샷, 학교 근처 어딘가에서 사진 찍기 등의 미션을 마치면서, 어쩌면 금방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았다. 팀장도 우승보다는 즐기는 데 의의를 두었고, 나도 적당히 하다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팀원들이 중간에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더니, 갑자기 버스를 타기 시작했다. 에이, 이 늦은 시간에 그렇게까지 멀리 가겠어. 아무리 안전한 폴란드라도 유럽인데, 이 시간까지 중심지로 가지는 않겠지. 버스에 탈 때까지만 해도 그리 생각했지만, 어라. 점점 버스가 학교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한 30분 정도 가서 위 사진의 술집거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슬픈 현실을 직감했다. 아, 오늘은 일찍 못 돌아가겠구나.
술이 연관된 본격적인 미션들은 여기서부터 시작이 되는데, 솔직히 이때의 투리는 몸도 안 좋고 빨리 돌아가고 싶었어서 미션 내용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옆에서 본 팀원으로써 아는 대로 얘기하면, 팀마다 정해진 펍들이 있다. 그러면 해당 펍들에서 같이 무언가를 마시거나, 정해진 룰을 완수하는 식으로 미션을 클리어해야 한다. 펍 안에는 정해진 주최 임원들이 있다. 그 임원들이 보는 앞에서 미션을 클리어하고 인증 도장을 찍으면, 미션 승리에 필요한 점수를 얻는 것이다.
맨 위 두 장의 사진들을 보면 상당히 광란의 미션 수행 장면처럼 보이는데, 저 때 당시가 미션이 중반쯤 진행될 즈음이었다. 해당 미션은 원형으로 모인 다음 각자가 따른 잔을 옆사람한테 넘기고 마시는 미션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또 기억에 남는 미션은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구부리는 순간에 맥주 다 마시기였다. 조를 짜기 전에 우연히 터키 쪽 동기한테 들은 얘기였는데, 다른 게임은 쉬워도 그 팔굽혀펴기 미션만큼은 절대 도전하지 말란다. 어지간히도 어려운 미션인가 보다.
미션 수행 과정에서는 꽤 특이한 술도 볼 수 있었는데, 무슨 술인지는 모르겠다만 갑자기 술에 불을 지피더니 후추 같은 물체를 뿌리면서 활활 타오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위 사진은 그 술에 있는 불을 더 크게 타오르게 하는 장면인데, 종업원이 그 불타는 술(?)을 손님의 잔에 건네면 손님은 술에 타오르는 불을 불어서 끈 다음 원샷을 한 다음 빨대로 연기를 내뿜는다.
아무튼 그런 기상천외한 술 제조 방식까지 보고, 우리 팀은 다음 펍으로 향했다. 기침이 하염없이 나왔기에, 본인은 그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때 문제가 터졌다. 펍에서 조원들을 놓치고 말았다. 다행히도 다른 팀 조원들이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조금 난처해졌다. 몸 상태는 안 좋은데, 조원들은 안 보이고. 그렇다니 그냥 가기에는 계란이 걸리고.
어차피 게임이 끝나면 다시 학교에 모이지 않을까 싶기는 했다. 하지만 조금만 일행과 떨어지니 주변 여자들이 "우리 펍에 오지 않을래~?"라고 호객행위를 했다. 당시에는 유럽 경험이 처음이라, 그런 데서 혼자 버스를 기다리기에는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펍에 남아서 다른 팀과 붙어 있기로 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니, 우연히 팀장과 동료들을 만나 겨우 합류할 수 있었다. 원래는 팀끼리 편하게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미션 성공이 수월했나 보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우승을 목표로 달리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경찰차 사진 인증에 협조를 하고 말았다.
남은 미션은 이제 그 커플 키스 촬영 미션이랑 동물 찍기 미션. 동물 건은 나중에 따로 보내는 걸로 마무리했고, 남은 건 커플 사진. 커플이건 뭐건, 본인은 감기 때문에 상태가 말이 아니라 빨리 끝내기만 한다면 베스트였다. 그러다 중간에 팀장이 본인한테 아주 인상적인 말을 했다.
너, 나랑 키스 한 번 할래?
당연히 장난으로 한 말이다. 폴란드에서 아주 가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볼에 키스를 하면서 인사하는 건 봤지만, 그건 친한 경우의 얘기. 러시아인인 팀장의 문화에도 그런 인사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 처음 본 사람한테 키스하는 문화권?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연애 고수라면 능글맞고 센스 있게 대답을 했겠지만, 아쉽게도 투리는 진지충 성향. 연애에 심히 단점으로 작용하는 특징의 소유자이다. 겨우 저기압 텐션이라도 유지한 채, 빨리 기숙사에나 돌아가고 싶다는 티를 낸다. 결국 그날은 팀장과 다른 독일 동기와 함께 우버로 귀가하는 엔딩.
어쨌거나 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투리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일단 본인은 노는 스타일은 아니다. 혹여나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위의 행사들이 나름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본인에게 살갑게 다가와주는 외국 동기에게 참으로 감사함을 느낀다. 적어도 한국 학교를 다닐 때보다는 많이 행복하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