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 도시 박물관>, 궁전 속 산업도시의 역사극장
혹시 위의 속담을 들어본 적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속담은 북한의 속담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해석하면 한 사람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마을 하나 수준이 희생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참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북한다운 속담이다. 여러분은 이 속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론 "흥부와 놀부" 속 놀부,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 영감처럼 못된 부자의 표본들도 참 많이 있다. 그렇지만 한 부자나 거대한 기업이 도시, 심지어는 나라 하나를 먹여 살리는 사례들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뭐 정리하면 부자라고 무조건 나쁜 사람이 아니고, 가난하다고 무조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그런 간단한 논리를 말하는 거다. 재미있게도 이번에 투리가 소개할 장소가 이 얘기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해당 장소는 사실상 도시 구역 하나를 만든 거나 다름없는 거부(巨富)의 집을 바탕으로 만든 박물관이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이 바로 그 박물관의 정면 모습이다. 저기가 한때 우치의 최고 부자가 살았던 집이라는데, 어떤가? 원체 폴란드 속 우치라는 도시가 산업도시 이미지라 칙칙한 감은 있지만, 그럼에도 으리으리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어 보인다. 저 舊 집(?)의 원주인은 도시의 섬유 산업을 이끈 이즈라엘 포즈난스키(Izrael Poznański)로,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위와 같이 화려한 형태의 궁전을 지었다. 그러다가 세계 2차 대전 이후 폴란드가 공산주의의 물결을 타면서 국유화 과정에 의해 박물관으로 전환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와중에 건물의 형태는 계속 복원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마저도 저 건물에 감탄했을 정도이니,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포즈난스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면, 이 갑부는 가문이 운영하는 공장을 통해 면방직과 직물 생산 산업을 이끌어 그 시절의 우치를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투리가 나중 글에서 마누파크투라와 같은 쇼핑과 문화 단지들을 다룰 예정인데, 그 장소들의 초기 형태를 만든 사람도 포즈난스키다. 그의 영향 덕분인가, 19세기 시절 우치는 50년 동안 10년씩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포즈난스키는 거의 '킹'메이커, 아니 '시티'메이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투리는 포즈난스키를 무작정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가 이룬 발전 뒤에는 혹사당한 수만 명의 노동자들과 사회적 격차의 심화라는 어두운 이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적으로 그의 사업으로 인해 만들어진 대도시 하나가 지금까지도 폴란드에 영향을 끼치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에 투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부가 무조건 대기업이나 부자들을 규제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을 개선하게 방향을 이끈다면 세상이 나아지지 않을까. 도시의 인구가 늘어난 것도 어떻게 보면 포즈난스키를 비롯한 부자들이 그렇게 만든 거니까. 아무튼 이야기의 결론, 북한의 속담은 이번 사례에서 최소 반은 틀렸다. 비록 사람들은 희생되었지만, 대도시 하나가 탄생했으니까!
서론이 너무 길었다. 비록 유일한 부자는 아니지만 대도시 하나를 만든 남자가 살았던 집이라니, 궁금하지 않은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이다. 안을 한 번 들여다보자!
짜잔! 여기가 바로 복도의 모습이다! 뭔가 느낌 있지 않나? 우치는 본래 산업도시로서 있었던 기간이 긴 탓에 분위기가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는 우중충한 편이다. 그런데도 이런 휘황찬란한 장소가 우치에 있는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제부터 안의 사진을 계속 보여줄 예정인데, 사진들을 감상하면서 포즈난스키의 삶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하하.
본격적으로 이 박물관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이곳은 '우치 도시 박물관'. 우치라는 도시의 역사를 이 호화 저택 안에 담은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우치의 건축, 사진, 기록, 생활사 등이 기록된 여러 흔적들과 우치와 관련된 위대한 시민들의 발자취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아래층에는 우치가 산업 도시 및 지금의 도시가 되기까지의 서사가 담긴 역사적 사료들을 볼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지상층의 내용 위주로 박물관을 보여주도록 하겠다. 아무래도 부자의 삶은 지하보다는 지상에서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니까 말이다.
먼저 이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부터 간략히 알아보자. 이 건물의 지상은 0층(한국식으로 따지면 여기가 1층. 그에 따라 유럽의 1층은 한국식으로 2층이다)과 1층으로 되어 있는데, 0층은 주로 사무실과 상점 역할을 담당했다. 1층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표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주 가족이 거주하는 사적인 공간이었다고 한다.
투리가 이 방문관을 방문했을 때 실질적인 전시는 1층부터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지금부터 나오는 거의 모든 사진들은 1층에서 찍은 장면들이다. 그들 중 사진에 나온 일부 공간들 중에는 원래의 장식이나 가구를 그대로 복원시킨 것도 있다.
위 사진의 장소는 미러 룸! 대충 규모와 장식을 보면 짐작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곳은 주로 무도회가 열린 곳이다. 단순히 무도회뿐만 아니라, 사진의 스크린 쪽 무대에서 영화 공연이나 콘서트도 이따금씩 상영되었다고 한다. 한 가문이 이 정도 공간을 소유했다고 하면 재력이 어느 정도일지 드디어 상상이 되지 않는가? 당시 시대상과 우치의 서민층을 생각하면 도시 제1의 부자는 되어야 소유할 만한 곳은 맞는 것 같다.
통로 벽 같은 곳을 지나가다 보면 이런 회화 그림들도 걸려 있었다. 포즈난스키 가문은 예술계에 대해서도 장학금 등을 통해 예술가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사무엘 히르젠베르크(Samuel Hirszenberg)라는 작가 같은 경우는 후원자들을 위해 완성한 가장 큰 의뢰작이 포즈난스키 가문을 위한 연작 회화였다고 한다. 위의 두 사진에 있는 그림이 그들 중 일부인데, 불행히도 현재 작품이 모두 남아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아마 없어진 작품들 상당수는 세계 2차 전쟁으로 인해 파손된 것 같다.
위의 두 사진에 나와 있는 공간은 두 개의 대표 응접실이다. 위 장소들 모두 궁전의 공식 구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러분이 저 집의 주인이라고 가정하면서 손님을 저런 곳으로 응접 한다고 상상해 보라. 뭔가 낭만적이지 않나?
저 공간들은 순전히 궁전 주인의 취향과 문화적 선호를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방으로, 위의 응접실들에 있는 가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수집된 것들이다. 저때는 부유한 가문들 사이에서 가구, 조각, 그림, 공예품을 수집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부자들의 취향은 역시 고급스럽다. 물론 저기 걸려 있는 그림 컬렉션도 예외는 아니다. 아까 언급했던 사무엘 히르젠베르크를 비롯해 그의 동생 레온 히르젠베르크(Leon Hirszenberg), 마우리치 트릉바치(Maurycy Trębacz)가 그 그림들의 작가였다고 한다. 이 세 작가는 모두 유대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다음 장소는 대식당(Great Dining Room)으로, 궁전에서 가장 화려하고 원형 그대로 보존된 장식이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점심이나 저녁 식사뿐만 아니라 포즈난스키 가문의 회사 이사회 회의도 진행되는 장소였다고 한다.
설명서에 따르면 이 대식당의 장식은 이즈라엘 포즈난스키가 죽은 직후인 마지막 개조 시기에 만들어졌다. 장식을 만든 이유는 가문의 원로의 위엄과 그가 남긴 막대한 재상의 위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방 역시 넓기도 했지만, 장식도 마찬가지로 엄청났다. 포즈난스키도 이 부분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방의 위쪽에는 힘과 상업의 상징인 그리핀(griffin) 석고를 전시해 두었다. 거기에 대놓고 대륙을 지배하고 그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상징을 담은 기둥도 만들어 놓았다. 대체 자신감이 어디까지 향해 있던 것인가, 이 남자.
다음 방은 아까보다는 조금 더 캐주얼한 방이다. 여기는 남성들의 사교 모임과 비즈니스를 모임을 위해 활용되던 공간이다. 그중 첫 번째 방은 카드놀이와 흡연실로 사용되었고, 두 번째 방은 당구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자, 여기서 중년 남성들만 모이는 장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사업과 정치 이야기! 아직 아재(?)보다는 파릇파릇한 투리마저 이제는 사업이나 정치가 남 얘기 같지 않은데, 당시 직장인 남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이런 소규모 모임 장소에는 그런 이야기들도 오갔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해당 방에는 클럽 스타일의 가구가 반드시 구비되어 있었고, 인테리어도 벽 패널과 장식띠, 오크 나무의 천장 등으로 꾸며져 있었다.
방에는 가구, 탁자뿐만 아니라 접이식 탁자와 벽 마감재, 벽면에 붙은 작은 수납장까지 원형 그대로 재현해 두었다. 또한 오크 나무 같은 경우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두워지는 특징이 있는데, 일부러 방부 처리를 해 두어서 색깔을 유지시켰다고 한다. 참고로 남자들끼리 당구를 하면 또 당기는 게 담배 아닌가. 이 공간 근처에는 담배를 즐기기 위한 도구와 세트도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당시에 피웠던 담배는 주로 가루로 만든 코담배였다고 한다. 잠깐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려보자. 방금 본 사진들 속 식탁 위에서 담배를 문 채 게임을 하거나 당구를 치는 와이셔츠 차림의 신사들의 모습을. 역시, 남자란 시대상을 막론하고 그런 존재인 것인가.
자, 여기서부터 보여줄 공간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적 공간에 속한다. 위의 사진을 비롯해 아래의 두 사진 속 방들은 안주인의 거주 공간이다. 어떤 공간은 작은 응접실 용도로 활용되었으며, 또 어떤 공간은 화장 공간이었다. 어떤 공간은 드레스룸 역할을 하면서 목욕방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위의 장소에서 보존된 장식들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가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침실과 화장 공간의 목재 요소들은 공장주 가문 출신의 부유한 여성들의 일상생활을 보여주었는데, 과거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의 한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들과 같지 않았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즈라엘 포즈난스키의 부인이자 자선가 레오니아 포즈난스카(Leonia Poznańska) 역시 그러한 시대를 살아갔던 한 여자에 해당했지만, 그럼에도 이 궁전을 세운 데는 그녀의 업적이 상당했다. 덕분에 포즈난스카는 이 위계 속에서 적절한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집의 호화로움을 자랑하는 핵심 요소들은 다 본 것 같고, 이제부터 보여줄 장소들은 우치와 관련한 사람들의 흔적을 담은 공간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투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루투르 루빈스타인(Artur Rubinstein)'밖에 없다.
사진들을 보라. 투리의 독자들 중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팬 분들이 계신다면 환호의 함성을 내지를 것 같다. 그를 기리는 수많은 흔적들이 보시다시피 이렇게 많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독자들은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누구인지 갸우뚱할 반응일 텐데,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 폴란드 태생의 미국인이다. 엄청난 완벽주의자에 태생적으로 뛰어난 청각적 능력을 보유한 루빈스타인은 여러 작곡가들의 곡들을 당당하고 이해하기 쉽게 연주한다고 평가받지만, 그중 압권은 역시 '쇼팽'이다. 힘 있는 기교와 깊은 음악성을 쇼팽의 피아노곡들에 잘 녹여낸 루빈스타인은 당대 쇼팽 연주자들 중 일인자로 꼽혔다고 한다.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실제로 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8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피아노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들 역시 레퍼토리로 기억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능력과 관련해 그는 연주회로 가는 기차 안에서 특정 곡을 피아노 없이 무릎 위에서 연주하며 익힌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언급에 의하면 자신이 기억하는 방식은 마치 사진과 같아서, 악보를 회상할 때 잘못 묻은 커피 얼룩까지 떠올릴 정도라고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완전기억능력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투리도 저렇게 기억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참으로 궁금하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를 내용이지만, 루빈스타인은 뛰어난 음악 계보까지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는 카를 하인리히 바르트(Karl Heinrich Barth)에게 교육을 받았는데, 바르트는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였고, 리스트는 카를 체르니의 제자, 체르니는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제자였다. 리스트, 체르니, 베토벤이라.... 이름만 들어도 이 계보는 이미 찢었다.
슬슬 이 박물관의 전시관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마지막 방은 위 사진에 있는 舊 손님용 공간으로 마무리하고자 하는데, 레오니아와 이즈라엘 포즈난스키의 아들 중 한 명이 가족과 함께 이곳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 방에 있는 요소들만으로는 정보가 부족해서 각 방의 정확한 용도를 파악하기에는 어렵다고 한다. 다만 우아하고 섬세한 장식과 어두운 색채는 해당 방에 서재의 성격을 띠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이곳의 전시실에는 작업용으로 쓰였던 액세서리와 가구, 그리고 과거 포즈난스키 가문의 유산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이 지상층에 있었던 '우치 도시 박물관'의 전반적인 줄거리였다. 어떤가, 글을 보면서 잠깐 동안 부자 이즈라엘 포즈난스키에 이입하며 눈호강했는가? 아쉽게도 이제는 현실로 돌아올 시간! 독자 여러분은 멋진 현생을 살 의무가 있지 않은가? 여러분 대다수는 포즈난스키처럼 크고 멋진 집을 가지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보다 수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현재를 당당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저런 곳에 사는 남자가 부럽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그 부자의 삶을 사는 건 또 다른 얘기니까 말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 투리는 이 박물관 이외에도 아직 공개하지 않은 수많은 유럽(특히 폴란드)의 건축물들이 있다. 혹시라도 유럽 저택의 환상이 끝나 버려서 아쉬운 분들이 계시다면, 앞으로도 수많은 유럽 궁궐과 저택에 관한 글들을 올릴 테니 투리의 글에 수시로 관심과 애정 가져 주시길 바란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왕궁, 오스트리아의 시시 박물관을 비롯한 수많은 관광지 사진들이 본인들의 업로드 순서를 기다린 채, 아직 투리의 사진첩에 잠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즐거웠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