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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어 사랑

by 가을산 Feb 20. 2025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었다. 프랑스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아멜 선생님이 한 말을 그대로 믿었다.


   전쟁에서 패해 독일로 넘어간 알자스의 학교에서 더는 프랑스어를 가르칠 수 없게 된 아멜 선생님은 어린 학생들과 마지막 프랑스어 수업을 들으려고 뒤에 와서 앉은 마을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는 세상에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말했다. 노예의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 말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40년 동안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정오를 알리는 시계 소리에 벌떡 일어나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자 칠판으로 돌아서 분필로 최대한 크게 ‘프랑스 만세’ 라 썼다. 한동안 꼼짝 않고 서 있다가 다 끝났으니 그만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는 마지막 장면이 실제로 본 것처럼 마음에 남아있다.


   그때부터 프랑스어가 궁금했다. 프랑스어는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로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인지 들어보고 싶었다. 언어가 아름답다는 게 어떤 걸지도 생각해 보았다. 예쁜 소리로 만들어졌다는 말인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듯 청아하다는 뜻인지 고저장단이 있어 노래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는 건지. 또 프랑스어는 사교어로서 우아하다고 했는데 말이 우아하다는 게 대체 어떤 건지도 꼭 알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보를 쉽게 알아낼 수 있는 때가 아니어서 프랑스말(그때는 불어라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불어라 하겠다)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동경했다. 모르면 사랑한다.


   커갈수록 알퐁스 도데와 ‘어린 왕자’, 루이 14세와 프랑스 혁명,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레옹, 로베스 피에르, 플로베르, 사르트르, 루브르 박물관...... 내 머릿속은 가보지 못한 프랑스에 관한 온갖 이미지로 가득 찼다. 그렇지만 불어를 배우려면 제2 외국어를 배우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제2 외국어는 독어와 불어 중에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나는 당연히 불어를 선택하지 누가 독어를 선택한담, 했다. <마지막 수업>의 영향도 있고 독일과 독어에 대한 선입관이 좋지 않아서였다. 나치와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영화에서 들리는 독어는 뜻은 몰라도 소름 끼치도록 기괴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대결 구도에서 내 마음은 언제나 프랑스 편이었다.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 언니가 부르던 불어 노래, ‘...쏘르디 꼬르디 똥꽁 피이야...’를 나도 이제 부를 수 있겠지 하며 한껏 설레는 나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전까지는 불어와 독어를 마음대로 선택했는데 그 해부터 홀수반은 독어, 짝수반은 불어를 배우도록 했다는 게 아닌가. 나는 홀수반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했다. 그토록 오래 불어를 만나기를 소원했는데 법이 바뀌다니. 그런 무지막지한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독어 첫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앞으로 불문학을 전공할 계획이 있다든가 언니나 오빠가 불어를 배워서 불어를 배우는 게 낫겠다 싶으면 말하라, 그러면 같은 시간에 독어와 불어 수업을 하니 옆 반에 가서 배울 수 있게 해주겠다고.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니 오히려 나는 당신 수업 듣기 싫어요, 불어를 배울래요, 라고 말하기가 미안했다. 그제야 내가 반을 바꿔가면서까지 반드시 불어를 배워야 할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오랫동안 불어를 동경했지만 불문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프랑스 유학을 앞두거나 프랑스인 가정에 입양될 예정도 없다. 나는 그저 프랑스라는 나라와 프랑스어에 대한 환상 때문에, 유럽의 상류층에서 쓰이는 사교어라는 불어를 내 입으로 말해보고 싶은 허영 때문에 불어를 배우려 했다는 걸 깨달았다.


   또, 나는 튀는 걸 무척 싫어하여 되도록 익명으로 살고자 하는 아이였다. 남의 교실에 가서 잘 모르는 애들과 섞여 공부하기가 아무렇지 않을 만큼 남을 의식하지 않는 아이도 아니고 사교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께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훨씬 쉽다. 옆 반에 가서 불어를 배운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옆 반에 가서 예쁘장하고 잘 웃던 불어 선생님께 불어를 배웠으면 어땠을까? 일주일에 한 번씩 드나들다 보면 불어 시간마다 내가 앉을 자리도 하나 마련되었을 테고 점차 적응되어 불어 시간만큼은 그 반 학생과 동류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남의 반이라 내 존재가 도드라지니 더 열심히 불어를 공부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거기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평생을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쉽게 꼬리를 내렸다.


   자기 계발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쉬운 길을 가지 말고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나는 선생님께 어렵사리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되고 양쪽 반에서 유별나게 볼 아이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쉬운 길을 갔다. 프루스트의 시에서처럼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미련은 남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프랑스를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불어를 조금은 알고 가야겠다 싶어 도서관에서 불어 회화 교재를 빌렸다. 책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처음으로 봉 주르~라 하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내 입에서 불어가 나오다니, 오매불망 그리워한 지 대체 얼마만인가.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공부한 양이 너무 적어 현지에 갔을 때 간판만 몇 개 읽을 수 있었을 뿐 한마디 말도 해보지 못했다.


   몇 해 전 이사를 와서 보니 동사무소의 주민 대상 프로그램에 ‘프랑스어 원어민 강좌’가 있었다. 몹시 기뻐서 바로 신청했다. 우리나라 남자와 결혼한 젊은 프랑스인 선생님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즐겁게 배운 지 반년도 안 되어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무기한 휴강이 되었다. 다시 열려 했을 때는 신청자 수가 부족하여 그만 폐강되고 말았다. 프랑스어 강좌가 열리는 곳이 좀처럼 없어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이 왔었는데 그들이 신청하지 않은 탓이었을까? 무척 아쉬웠다.


   그 후로는 독학했다. 좋다는 문법 책을 한 권 사서 문제도 빠짐없이 풀며 끝까지 보았다. 쉽게 가르친다는 교재도 빌려보고 유튜브에서 불어 강좌를 찾아 듣기도 했다. 조금 실력이 쌓였다 싶었을 때 사전을 옆에 두고 <어린 왕자>를 원어로 읽었다. 불어를 배워서 얻게 된 가장 큰 기쁨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먼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마지막 수업>의 일부를 볼 때도 가슴이 벅찼다. 아, 이걸 원어로 읽다니, 나의 프랑스어 사랑이 시작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은 공부하지 않아서 가진 자산이 없는 중에도 더 잃어버려 거의 빈털터리가 됐다. 프랑스 영화를 보면 당연히 못 알아듣는다. 응, 아니, 만 들리지만 그건 불어를 몰라도 몸짓으로 누구나 아는 거고.


   불어가 가장 분명한 언어인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어떤 학자는 불어가 써놓고 발음하지 않는 철자가 많다고 비경제적인 언어라고 했다. <작은 아씨들>의 ‘조’는 불어를 두고 세상에 그렇게 멍청한 언어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가 꿈이던 유럽에 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름다움은? 음, 내가 듣기에 불어는 새는 것 같은 소리도 있고 해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또랑또랑하지는 않다. 청아하다기보다는 물 흐르듯 스르륵 지나가는 것 같은데 그걸 부드럽다고 해야 할지. 몇몇 음은 도저히 원어민처럼 발음할 수 없고 잘 못 들어서인지 리듬감도 느끼지 못하겠다. 그러나 불어로 된 문학 작품에는 아름답다는 칭송이 자자하다. 불어의 아름다움은 내가 지각하는 아름다움 너머에 있는 것 같다.


   불어가 우아한 사교어라는 말에는 반감이 든다. 예쁜 단어를 골라 표준 발음에 콧소리를 완벽하게 내기만 하면 우아한 사교어가 되는가? 우아함은 태도에서 나온다. 무슨 언어를 쓰는가보다 그 언어를 쓰며 어떻게 행동하는가에서.

   이제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웃는 얼굴로 친절하고 상냥하게 하는 한국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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