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에 살아요

by 가을산

우리 집 맞은편에 재건축하는 아파트가 있다. 15층짜리 아파트를 허물고 고층 아파트를 세우는 과정을 눈앞에서 다 보았다. 처음 이쪽저쪽에서 동시에 여러 동을 부수어 점점 낮아지는 건물을 보니 왠지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어 날마다 보며 ‘벌써 저만큼 부쉈네’, ‘저렇게 낮아졌네’, 했다.

아이들은 한 글자씩 세로로 새겨져 있던 상가 이름이 위에서부터 하나씩 없어지는 걸 보며 ‘아, o자도 사라졌어’ 하며 안타까워했다. 여러 대의 굴착기가 와 부서진 석재와 흙을 끝없이 실어냈다. 그곳이 텅 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파트가 허물어지고 사라져갈 땐 한 가닥 애수를 느꼈지만 완전히 사라지고 나니 가려졌던 산도 보이고 만주 벌판처럼 훤한 공간이 펼쳐져 무척 좋았다. 새 아파트를 짓지 말고 이대로 놔두면 참 좋겠다 했다.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허물어 놓기만 하고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다. 업체와 주민 간에 합의되지 않는 점이 있어서라는 소문이 돌더니 허문 땅에서 유물이 출토되어서라고도 했다. 우리야 좋았지만 일하기 좋은 봄, 여름, 가을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으니 딱하기도 했다.

거의 일 년을 놀리다가 겨울로 들어설 무렵에야 사람들이 나타나 일을 시작했다. 계획보다 늦어져서인지 그 후로는 아주 열심이었다. 아침 7시만 되면 일하는 모습이 보이고 토요일도, 눈 오는 날도 쉬지 않았다. 그 결과, 하루가 다르게 층이 올라가더니 완공되어 이제 입주를 앞두고 있다. 입주는 5월에서 11월로, 다시 12월로 늦춰졌다는데 아직 이사 오는 기미는 없다. 만주 벌판은 사라진 지 오래고 빽빽한 아파트 숲이 새로 생겼다.


아파트를 허물기도 전부터 아이들과 새 아파트의 이름은 뭐가 될지 추측해 보았다. 분명 무슨 ‘움’일 거야, 공원이 가까이 있으니 ‘파크움’일까? 무슨 ‘팰리스’일지도 몰라, 영어 단어 두 개를 합할 수도 있어. ‘파크 팰리스?’ 우리 중 누구도 아파트 이름을 삼성, 우성 같은 건설 회사 이름이나 장미, 백조 같은 우리말로 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사 온 지 7년 된 우리 아파트 이름도 영어다. 이사 올 때 10년 된 아파트였으니 그로부터 10년 전에도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집을 알아볼 때 그쯤 된 아파트는 전부 이름이 영어였다. 영어 이름인지 아닌지에 따라 오래된 아파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판이었다. ‘꿈에 그린’, ‘하늘채’ 같은 정겨운 우리말을 아파트에 붙이던 건설 회사들이 앞다투어 영어 이름을 지었다. 아니, 영어만이 아니라 온 세계 언어를 다 가져와 이리저리 뜯고 붙였다.

롯데나 현대 같은 이름의 아파트에 살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뜻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외국어 이름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려 대상에서 뺀 아파트도 있다. 이사를 싫어하여 한 번 이사 가면 오래 살 텐데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의 집에서 살기는 싫었다. ‘이름이 뭐면 어때, 살기 좋으면 됐지!’ 할 사람도 분명 있을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우리 집 이름이 기괴한 외국어인 건 싫으니 어쩌랴.


지금 집 이름도 외국어 두 단어가 합쳐진 건데 다른 이름에 비해서는 받아들일 만해서 왔다. 누군가는 이 이름도 이게 대체 뭔 말이냐, 이름도 참 괴상하다, 할지 모르나 온통 외국어 이름이고 다른 조건도 챙기려니 선택지도 별로 없었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요즘 아파트 이름은 왜 그렇게 어렵게 짓는지 모르겠어요. 현대, 극동, 얼마나 좋습니까?’ 하셨다. 맞다. 두 글자로 된 우리 말 이름, 얼마나 쉽고 좋은가.


아파트 이름이 어려운 이유가 ‘시어머니가 찾아오기 어렵게 하려고’라는 농담이 있다. 시어머니를 우습게 보는 말이다. 요즘 시어머니들은 웬만큼 교육받아 영어뿐 아니라 일어, 중국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아파트 이름으로 쓰인 그까짓 영어 한마디 못 읽으랴.

그리고 시어머니 어렵게, 라면 비슷한 연배일 친정엄마는? 친정엄마와 친정아버지가 나이가 많이 들어 자가용 아닌 택시를 타고 딸네 집에 올 때 딸이 사는 아파트의 이름을 못 대도 좋은가? 나이 들면 우리말인 ‘현대’ 아파트는 쉽게 생각나도 ‘힐스테이트’라는 이름은 바로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내 친구는 ‘에일린의 뜰’이라는 이름의 아파트에 산다. 친구하고는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처음 들었을 때 입안에서 몇 번 굴려 가며 외웠다. 이런 이름, 노약자가 기억하고 발음하기 쉬울까? 택시 기사의 평균 연령도 올라갔던데 단번에 알아들을까?

사춘기 아이들이 유난스러운 건 ‘사춘기라서 그래, 사춘기야 사춘기’라고 너무 사춘기를 쳐들고 인정해서라는 말이 있다. 시어머님은, 먹고 사는 것도 어려워 자식이 일곱이라도 사춘기라고 속 썩인 자식 하나 없고, 혼자 자식들 키우느라 정신없어 갱년기가 뭔지도 모르고 지났다고 하셨다.

고등학생 조카가 제 엄마한테 질풍노도의 시기인데 어쩌란 말이냐며 대들었대서 ‘질풍노도’를 한자로 쓸 수나 있거든 그러라고 한 적이 있다. 사춘기가 벼슬은 아니지 않은가?


미혼인 딸이 여자들이 셤니, 샵쥐, 라고 하는 게 참 듣기 싫더라고 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일컫는 말임을 바로 알아들었는데 아들이 있어선지 나도 듣기 좋지 않았다. 애교로 쓴다고도 하는데 애교로 들리지 않는다. 친정엄마나 친정아버지를 두고는 그런 ‘애교 어’를 쓰지 않을 테니. 가령 친니, 나 친쥐, 라고 할까?

시부모가 예전 같은 특권을 내려놓거나 행사할 수 없는지 오래인데 왜 친정 부모는 늘 애틋한 존재이고 시부모는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삼아 얄궂은 말을 만들어 붙이고 희롱하는가? ‘사춘기’처럼 그런 선입관을 당연하다는 듯 퍼뜨리고 몰아가는 사회 분위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눈앞의 아파트가 번듯해질수록 아파트 이름이 뭐가 될지 궁금증이 더해갔다. 사실 공사하기 전부터 이름이 지어져 있었을지 모르는데 상관도 없는 우리가 괜히 머리를 싸맸다. 드디어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보고 나자 허무했다. 예측했던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아파트 이름은 그냥 동네 이름을 앞에 붙인 ‘oo 래미안 아이 파크’였다.

알고 보니 건설사에서 지은 이름에 동네 이름만 덧붙여 쓰는 방식이 유행이었다. ‘켄터키 치킨’ 같다. 한 번만 고심해서 지어놓으면 어디에 어떤 아파트를 세우든 더는 골치 아프게 작명할 필요가 없으니 편하겠다. 건설사 이름을 그대로 쓰던 것과 같은 듯 다르다.

세대 수가 많아 두 개의 건설사가 짓게 되면 이곳처럼 이름을 둘 다 붙인다. 각자 자기 회사를 드러내고 알리려는 거겠지만 서로 다른 회사 이름 두 개가 붙어있으니 나라 이름이 두 개 쓰인 것처럼 이상하다. 대림이니 현대니 직접 써놓지 않는데 회사 이름을 알까 하는 의문도 든다.

우리 아파트도 대단지라 자그마치 여섯 개의 건설사가 참여했다니 각각의 이름을 다 갖다 붙였더라면 얼마나 괴상했을까?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어 새 이름을 지었나 보다.


‘oo 캐슬’, ‘oo 팰리스’라는 이름의 아파트도 있다. 집이 성이나 궁전이라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아침저녁으로 그 이름을 보며 자신을 왕이나 왕비, 왕자나 공주로 착각하지 않을지. 나라면 마음에 들지 않아 진작에 버렸을 카드다.

‘팰리스’도 양에 차지 않는지 앞에 ‘타워’를 붙인 ‘타워 팰리스’도 있다.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높은 탑에 갇힌 동화 속 라푼젤이 생각났다. ‘라푼젤, 머리를 내려라’ 하면 맨 꼭대기의 창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긴 머리를 내려뜨리는 환상에 머리를 흔들었다.


파면된 대통령이 살았던 아파트는 ‘최고’나 ‘정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앞부분과 다른 외국어를 조합한 이름이 붙어있다.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왕이 되려 했던 그는 지금 가장 낮은 곳에 갇혀있다. 긴 머리카락 없이도 사람들을 불러올려 멋대로 부렸던 그의 부인도 최저층으로 내려져 갇혔다. 이름에 먼저 갇혀서는 아니었을까?

여기가 미국이야 어디야, 할 만큼 외국어로 도배된 거리, 거기에 아파트 이름까지 가세했다. 나라 밖에서는 우리 말을 배우려는 열기가 뜨겁다는데 우리는 왜 이럴까?


오래전에 살았던 아파트에는 건설사 이름 밑에 ‘꿈 마을’, ‘샘 마을’ 같은 이름도 붙어있었다. ‘꿈 마을에 살아요’, ‘샘 마을로 가주세요’ 하면 얼마나 듣기 좋은가.


우리 집에 뜻도 모를 외국어 대신 누구나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고 느낌도 좋은 우리말 이름을 걸면 정말 좋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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