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by 가을산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볼 때 맨 먼저 나오는 화면이 있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이다. 어린이용뿐 아니라 어른들이 보는 테이프에도 나왔다. 그때는 불량 비디오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었나 보다.


지금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명작 영화도 새로 만들어진 CD나 다른 경로로, 더 좋은 화질로 볼 수 있어서일 테다. 예전에 보던 비디오테이프가 남아있더라도 테이프 재생기를 처분하여 볼 수 없는 집도 있다. 현대의 어린이들이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불량 비디오를 시청할 위험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불량 영상은 컴퓨터나 어린이도 가지고 있는 휴대 전화로 더욱 손쉽게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할까?


사회가 달라지면 조심해야 할 것이 달라지고 더 늘어나기도 한다. 옛날 어린이들은 방과 후 친구들과 실컷 놀다 저녁 늦게 집에 오기도 했지만 요즘 어린이들은 교문을 나오자마자 부모에게 납치된다. 시장을 통과하거나 고개를 넘어 2, 30분씩 걸어서 통학하던 때와 달리 집에서 5분이나 10분 거리에 학교가 있어도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아이를 모셔오고 모셔간다. 맞벌이 부부는 자녀가 학교나 유치원에 가고 올 때 동반할 사람을 고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인심이 흉흉해졌다는 뜻일 테다.


아이들은 모르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고 나이 든 사람은 빙판길도 조심해야 한다. 길 건널 때도 조심, 전화 사기도 조심, 과다한 휴대 전화 사용도 조심. 조심할 게 이리 많지만 내가 조심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다. 건강이다. 나는 건강하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가끔 생각하지만 건강을 조심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건강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쓴다. 연말, 단체 대화방에서 나누는 인사말에도 새해에 건강 조심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쓰는지. 사주를 풀어주는 사람도 ‘이 사람은 올해 건강 조심해야 돼요’ 한다. 아니, 물가에 가는 걸 조심해라, 해외에 갈 일 있으면 조심해라, 운전 조심해라, 는 할 수 있지만 건강을 조심하라니. 대체 왜? 건강이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것인가?


줄임말을 많이 쓴다. ‘문화센터’를 ‘문센’, ‘파리 바게트’를 ‘피비’, ‘버스 정류장’을 ‘버정’이라고까지 한다. 그런데 ‘건강 상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할 걸 ‘건강 조심’이라고 줄이는 건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줄이더라도 반드시 들어가야 할 말이 있고 빼도 되는 말이 있다. 건강과 조심, 두 단어만 남기는 건 취사 선택이 잘못되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바라는 게 건강인데 ‘건강 조심’이라니, ‘행복 조심’이라 하는 것처럼 이상하다. 행복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라며 앞으로 그 말까지 써대면 어쩔까 싶다. 결혼식에서 ‘행복 조심하세요!’ 라 외친다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조심하세요!’ 하면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망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라고 고맙게 받아들일 텐가? 그보다는 ‘조심’이라는 말에 깃든 불안한 기운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것 같다. ‘건강 조심’도 마찬가지다.


‘건강 조심’ 이라 하니 학교 다닐 때 봄이면 가슴에 달고 다니던 빨간 리본이 생각난다. 거기엔 세로로 굵게 ‘불조심’이라고 씌어 있었다. 건강이 불처럼 조심해야 할 건 아니지 않은가.


상대가 건강하기를 바란다면 ‘건강하세요’ 라 하는 게 좋다. ‘건강에 유의하세요’ 나 ‘건강 잘 돌보세요’ 도 좋다. 추상적인 ‘건강’이란 말 대신 구체적으로 ‘요즘 감기가 독하대요.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하면 더 좋다. 연로한 부모님께 하는 ‘밥 잘 챙겨 드시고 나들이할 때 조심하세요.’라는 말에서는 애정과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건강 조심하세요, 라고 냅다 소리치고 떠나는 것보다 얼마나 더 따스한가.

잘 가던 약국에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합니다’라는 글이 액자로 걸려 있었다. 건강은 무서워서 조심하며 피할 게 아니라 지키는 것이다. ‘감기 조심’은 해도 ‘건강 조심’은 하지 말자.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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