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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에서 사람을 보고, 산에서 속도를 배운다

크록스 청년과 프랑스 언니들, 그리고 끝에 남은 호흡

by 츤데레달언니

지평선이 칼로 그은 듯한 평원. 산티아고 순례길의 한가운데, 메세타다. 800km 중 200km 안팎이 이 넓은 밀밭이다. 저기 지평선과 맞닿은 끝까지 걸어가면, 또 다른 평원이 다시 펼쳐진다. 처음에는 하늘과 땅이 선명하게 갈리고, 그 외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는 그 넓음에 반하다가, 이내 지루해지는 길. 나는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흥겨운 가요에 기대어 걷는다.


이 구간은 스페인 하늘에 위로를 받으며, 그저 걸어만 가는 시간이다. 이쯤이면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먼저 움직이고 속도도 붙는다. 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 배낭의 무게도, 힘든 기색도 사라진다 어느 구간은 밀밭의 한가운데서, 어느 구간은 해바라기 밭을 지나며, 그러다가 쭉 뻗은 고속도로 옆의 작은 샛길을 걸으며 지루함과 싸우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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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민박집에서 눈인사를 하다 라면을 함께 끓여 먹게 된 K 순례자들과 친분이 쌓여 하루의 별별 고단함을 이야기 나누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분 봤어요? 그 모녀 봤어요? 그 아이들요?” 하며 서로 안부를 묻기도 하는데, 우리는 늘 서로를 궁금해하는 K 민족인가 보다


그날, 멀리서 배낭 아래 크록스를 매단 K 청년이 다가왔다. 크록스가 출렁이며 발소리와 박자를 맞춘다. 가까워지니 그는 휴대전화로 360도 평원을 비추며 어머니와 통화 중이었다.
“힘들지 않아, 아들?”
“엄마, 나 컨디션 괜찮아.”
“힘들겠다. 걷다가 힘들면 빨리 오렴….”
자상한 모자지간이다. 청년은 씩씩하게 인사하고 경쾌하게 앞장서 사라졌다.


저녁, 민박집에 모인 K 순례자들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그 청년으로 모였다. 알고 보니 그는 암 투병 중이었다. 환우 모임에서 들은 순례길을 체험해 보겠다며, 항암 중에 스페인으로 왔다고 했다. 낮에 평원에서 들었던 엄마의 목소리는 ‘응원’이면서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 뒤로 우리는 숙소에서 마주칠 때마다 “오늘도 크록스 청년을 만났나요?” 하고 응원 섞인 안부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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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타의 고도, 평원의 부르고스라는 천년의 도시를 지나자 들려온 소식. 청년은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져 귀국길을 택했다고 했다. 투병 중이라도 순례길을 체험하며 극복하고 싶었을 청년의 마음도, 길 내내 마음 졸였을 엄마의 마음도 알 것 같은 밤을 보냈다.


메세타 길에서는 사람을 만나면 늘어지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 길도 지루하고, 음악도 지루해질 무렵, 자꾸 마주치는 까미노들과 보폭을 맞추며 길 위의 힘겨움을 덜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만난 프랑스 언니들, 마리와 미셸. 피레네 근방에 산다는 60대 이웃 친구들로, 트레킹이 취미라 몽블랑과 네팔도 다녀왔다 했다. 바캉스처럼 2주 걷고 돌아가 내년에 남은 구간을 이어 걷겠다고 했다. 영어는 서툴러서, 내 초초보 불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뒤로 닷새쯤, 하루 한두 시간씩 함께 걸었다. 언니들의 수다는 결국 가족 이야기로 향한다. “최근에 할머니가 됐어요.” “2년 전에 남편과 이혼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의 여자 친구가 옆집 여자였더라고요. 그래도 지금은 셋이 잘 지내요.” 커피를 번갈아 사주고, 사진도 한 장 남겼다. 쿨한 프렌치 언니들은 평원이 얼추 끝나는 레온에 도착 이후 “아디오스!”를 남기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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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세타를 지나게 되면 산을 두어 차례 오르내린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오는 데에 더 공을 들여야 한다. 가파르기가 끝없고, 산길이라기보다 돌길이어서 자칫하면 굴러 떨어질 수도 있다. 발끝을 세우고, 숨을 낮추고, 천천히—더 천천히. 산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잠시 머물게 되는 마을들은 대개 중앙의 교회를 중심으로 둥글게 자리한다. 11~12세기 돌로 쌓은 교회, 첨탑, 원형 광장. 자연을 배경으로 중세 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마을 들이다. 어떤 곳에서는 흐르는 강이 마을 수영장인지 숲 속의 새소리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돈키호테가 넘었다는 돌다리도 건너기도 하고, 산꼭대기의 산장에서는 바람소리를 벗 삼아 잠이 들기도 했다. TV 예능 <스페인 하숙>의 배경이었다는 그 마을에서는 하숙집 흔적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없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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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어도 남는 것이 있다. 그 후로도 오래 남는 것들—첨탑 사이로 보이는 스페인 하늘, 구름 사이로 솟은 교회 첨탑, 광장에 비친 긴 그림자, 좁은 돌길과 그 옆의 오래된 집들, 자그마한 정원 꽃들, 물 위로 번지는 아이들 웃음소리.


정신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산길에서, 날마다 머무는 마을들의 독특함에 반했다.

오늘은 어떤 곳에서 잠이 들까 하는 기대 덕에 산을 올라도 덜 힘들었다. 그렇지만 내려오는 길에서 나도 모르게 다짐하게 된다. 천천히, 더 천천히. 그러다 보면, 안전하게 내려오면서 의외로 더딘 속도와 함께 더 많은 주변 경치를 보게 되기도 한다.

그것처럼.인생도 올라갈 때는 정상에 선다는 포부와 기대 덕분에 힘차게 오르지만, 내려올 때는 더욱 천천히 내려와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야 다치지 않고, 그래야 나를 둘러싼 주변이 더 잘 보이게 되는 것 처럼. 속도는 느려져도 더 많은 것이 보이는 내려오는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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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에서 사람을 보고, 산에서 속도를 배웠다. 그러고 보니 끝은 멀리 있는 선이 아니라, 지금 발끝에서 조금씩 다가오는 호흡 같았다.


이제 평원과 산을 넘어 몇 개의 도시를 지나자 순례길의 끄트머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여정이 갑자기 되새겨진다. 남은 길은 짧아졌는데, 지평선은 이상하게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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