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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의 끝, 그 길의 끝에서

묵시아 0km, 끝에서 보인 시작

by 츤데레달언니

스페인 북부를 가로지르는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가는 순례길은 4개의 자치주를 지나간다.

나바라 Navarra(시작점이라 걸음의 고통과 싸우게 되는), 라 리오하 La Rioja(와인밭이 물씬거리는), 카스티야 이 레온 Castilla y León(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 갈리시아 Galicia(산을 넘나들면서). 그리고 도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이다. 각 주마다 나의 몸과 마음이 바뀌게 되는, 특별한 감정의 변화와 스페인 대자연이 주는 경치의 변화가 어우러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고통과 낯섦이 앞섰지만, 며칠 지나니 길의 질감이 발바닥에 새겨졌다. 흙먼지 냄새, 새벽 공기의 물기, 바람이 바뀌는 순간마다 내 호흡도 얕아졌다가 깊어졌다. 풍경은 지도를 따라 이동했지만, 진짜로 이동한 것은 내 마음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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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자치주 갈리시아로 넘어오면, 한국 시래깃국 맛과 비슷한 갈리시아 수프(칼도 갈레고)와 뽈뽀(문어)의 향을 입안에 가득 담으며 ‘이제 곧 끝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길의 끝으로 갈수록 순례자들의 그룹은 흩어지며 오롯이 홀로 걷게 되는 것 같다. 그룹에서 지쳐서 그런 건 아니고,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을 보다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어차피 저녁 숙소에서 만나게 되니, 걷는 구간만큼은 홀로 걸으려고 했다. 내가 왜 여기 순례길을 오게 되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기 때문이랄까. 모든 카미노들은 대개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제 ‘부엔 카미노’는 입에 익숙한 “Hi” 정도의 가벼운 느낌으로 변해갔다. 인사가 의식에서 습관으로 옮겨가는 동안, 나의 시선은 더 안쪽으로, 내 호흡의 길이를 재는 쪽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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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 길로 왔는가. 처음부터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순례길 끝으로 갈수록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나에겐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이 떨어져 나간 일종의 정신의 쉼이 있었다. 걸으며 하는 명상이랄까. 걷다 보니 생각도 사라지고, 생각으로 인한 번뇌도 사라지고, 오로지 나의 생각은 ‘오늘 뭐 먹지, 어디서 자지, 화장실 어디지’ 정도로 단순해졌다.


그 단순함 덕분에 오랜만에 나의 몸 구석구석을 바라볼 기회를 얻었다. 발가락의 물집, 종아리의 당김, 어깨끈이 닿는 쇄골의 미세한 통증. 불편함으로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대단한 나였다. 나를 과장하지도, 폄하하지도 않고 “여기까지 걸어온 사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해서 미사를 드렸다. 굳이 나는 가톨릭 종교인은 아니었으나,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에 도착한 카미노로서 성지의 대성당 안에서 지나왔던 순례길을 벅차게 다시 복기해 보고, 같이 길을 걸었던 카미노들과 그리고 집에 있는 패밀리 카미노들에 대한 기원을 해보는 경건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살면서 또 이렇게 경건한 시간이 있을까 하는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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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이 길은 내게 대자연의 벅참과 몸의 고통을 조화롭게 엮어내며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그 말미에 산티아고 성당 안에서, 나는 길에서 얻은 ‘벅참과 고통의 공존’이 인생의 ‘행복과 슬픔의 공존’으로 이어짐을 느꼈다.


그러다가, 문득 순례길의 자연들—피레네 산, 숲, 메세타 평원, 산과 호수—을 떠올리다 보니 바다가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티아고 이후의, 순례길의 종착지인 스페인의 서쪽 항구 도시 묵시아(Muxía)로 80여 킬로를 더 가야만 했다.


묵시아 마지막 이정표 ‘0km’ 비석을 보면서, 비석 뒤로 대서양의 바다를 보면서, 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보면서 ‘이제 다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례길 800km를 나와 같이 걸었던 트레킹화를 벗어버리고, 맨발로 스페인 태양을 즐겼다. 발바닥에 닿는 뜨거운 돌의 감촉이 묘하게 위로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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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선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바다를 바라보는 자그만 로컬 레스토랑에 앉아, 대서양의 석양을 누리며 여유 있게 저녁 식사와 와인 한 잔을 천천히 비웠다. 잔이 비워질수록, 길에서 깨끗이 비워낸 마음이 더 분명해졌다.


그런데 문득 집에 가고 싶어졌다. 트레킹화를 벗어버린 지 채 두어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다른 신발이 신고 싶어졌다. 갑자기 하고 싶은 일이 떠오르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도 보고 싶어 져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다급하게 숙소로 들어가 자는 둥 마는 둥. ‘워워… 순례길 걸으면서 천천히 가자 했잖아.’ 마음의 소리가 꿈처럼 들렸다. 나는 결국 일찌감치 일어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이내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설렘이 되살아났다.


왜.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니까.

시작은 늘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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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써 산티아고 순례길 편을 마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총 여정과 궁금증들은 블로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50대 여자 혼자 순례길 다녀온후 최다 질문 (1)~(5): https://blog.naver.com/tellylog

50대 여자 혼자 순례길 30일 : https://blog.naver.com/tellylog/223350422939


그리고 다음 연재는 ‘새로운 전환의 기록: 치앙마이 한 달 살기’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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