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의 노란 화살표보다 더 진한 위로의 표식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전, 나는 결심했다. 조용히 걷자. 이번엔 혼자 생각해 보자.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들판과 갈대, 숲 속 오솔길. 초행이었지만 길 위의 노란 화살표가 반가웠고, 멀리 마을과 교회가 보이면 오늘의 도착지겠구나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가에서 커피에 빵 한 조각을 먹는 혼밥도,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홀로 먹는 저녁도 이상하게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순례길에선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같은 길을 걷는 동행자에게 우리는 자연스레 인사를 건넨다. 순례길이니까, 동반자를 배려하고 고통을 나누며—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일러주는 종교적 성스러움 때문일까. 혹은 같은 길을 걷는 동행자에 대한 예우일까. 그래서 스치는 누구에게든 어느새 “부엔 까미노” (Buen Camino)를 건넨다. ‘굿모닝’처럼 가볍지만, 묘하게 힘이 된다. 길의 선배를 만나면 다음 마을을 브리핑받고, 사진 명소에서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는 사진 메이트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이 욱신거리기 시작하자 앞서가는 이들의 보폭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발들은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인사가 이어지다 보폭이 맞아지면 나는 곧장 묻기도 했다. “How are your feet?” 그렇게 각자의 발과 무릎 상태를 공유하다가, 어느 틈엔가 그들의 인생 이야기로 나를 초대받기도 했다.
길 초반의 어느 비 오던 날, 말레이시아에서 온 한국인 십 대 자매를 만났다. 마침 나는 혼자 우비를 꺼내 입다가 도통 배낭 위로 우비를 씌울 수 없어, 배낭이 젖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부엔 까미노! 한국 사람이세요? 혹시 배낭 위에 우비 좀 씌워 주실 수 있을까요?”
선교사 부모님을 따라 말레이시아에서 십 대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성지 순례의 경험을 하고자 이 길을 왔다고 했다. 순례 장비 대신 평소 배낭과 운동화로. 그래도 소녀들은 씩씩하게 걸었다. 스쳐 가는 어느 국적, 어느 나이의 까미노와도 깔깔대며 수다를 떨 줄 아는, 어른들의 삶의 무게를 어렴풋이 아는 듯 조숙한 아이들이었다. 미국에 있는 딸이 떠올라 소녀들과 더 오래 대화를 나눴고, 그 뒤로 길 전체를 통틀어 서너 번 마주쳤다. 마지막 구간은 결국 함께 걷게 되었다.
소녀들의 엄마는 매일 아침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딸들의 휴대폰 GPS와 연결해, 다른 공간에서 같은 길을 함께 걷듯 하루 여정을 나눴다.
“엄마, 오늘은 비가 와요. 그래도 갈게요.”
“그래, 천천히. 오늘 표지판 사진도 보내줘.”
그날 내 일기장 제목은 이렇게 적혔다. “아이들은 순례길을 걸었고, 엄마는 휴대폰으로 걸었다.”
두 번째 만났을 땐 언니가 발목을 삐끗해 절뚝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긴 트레킹에 일반 운동화라니—안타까워 내 등산 스틱을 건넸다. 그 도시의 알베르게 이후로는 아이들을 20일 넘게 볼 수 없었다. 그 사이 길 위에선 소문으로만 안부를 물었다. “어제 그 자매 봤어요?” “언니는 쉬고, 동생만 조금 걷는다더군요.” 담담한 전언이 스쳐 갈 때마다 마음이 덜컥했다.
마지막 50km를 앞두고 우리는 다시 만났다. 이산가족 상봉 같았다. 언뜻 봐도 고생의 흔적이 역력한 소녀들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소녀들은 나를 “이모”라 불렀고, 그 뒤로 마지막 여정을 함께 걸었다. 도착해서는 한국식 뒤풀이로 소박한 만찬을 나누고 헤어졌다. 지금쯤이면 대학생이 되었을까. 소아과 의사가 되고 싶다던 그 말이 문득 궁금해진다.
길을 걷다 보니 작은 무리들이 자연스레 생겼다. 미국 팀, 유럽·호주 팀, 스페인 자국 팀, 한국 팀…. 조용히 혼밥을 즐기던 나도 발목에 등산 양말이 조여 염증이 생기며 크게 부어올랐다. 그때 영국 어르신 한 분이 내게 항생제 연고를 내밀었다.
“Take it. It helped me. It’ll help you too.”
연고는 정말 ‘요물’이었다. 금세 부기가 가라앉았다.
그 후로 나는 내게 남은 연고와 대일밴드, 붕대를 또 다른 이에게 건넸다. 햇빛 알레르기로 발이 부어오른 소녀에게, 물집을 터뜨릴 바늘이 필요한 이에게, 비를 맞는 이에게 우산을. 어떤 날은 내가 커피를 얻고, 다른 날엔 내가 와인을 샀다. 받은 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는 일, 그게 이 길의 방식이었다.
생각해 보면 길을 안내하는 노란 화살표처럼, “부엔 까미노”는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신호였다. 경쟁과 속도에 익숙한 일상에서는 살피지 못하던 주변을, 이 길에서는 기꺼이 살펴보라고 말하는 또 다른 화살표였다. 여기서는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손을 내밀었는지가 기억으로 남는다.
그래서 “부엔 까미노”는 인사를 넘어선 위로와 도움의 표식이었다. 먼저 도착은 기록일지 몰라도, 함께 도착은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