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벼워지고 비워내기
회사를 퇴직하고 처음엔 새벽 6시면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막상 갈 데가 없어 당황하다가, 어느덧 나만의 루틴으로 일상을 채우며 지내던 그해 여름,
나는 갑작스레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순례길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생 버킷리스트였으나,
내겐 딱히 궁금해할 만한 종교적인 이유도, 개인적인 이유도 없었다.
그저 갑자기 궁금해졌다. “왜들 가는 걸까? 다녀오면 알겠지.”
마침내겐 시간이 있었고, 부모님과의 5월 유럽 여행도 예정되어 있었기에
나는 즉시 귀국 편을 산티아고로 변경하고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난생처음 큰 등산용 배낭을 사고, 종로 5가 평화시장에서 트래킹화를 사며 설레던 순간.
유튜브와 검색포털을 뒤지며 준비물을 챙길 때,
내가 과연 800km를 걸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안중에도 없었다.
가족들은 혼자서 걸어보겠다는 나의 계획에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으나,
두근거림을 눈치챘는지 끝내 만류하지는 않았다.
2023년 6월 중순, 파리에서 부모님을 귀국 비행기에 태워드리고
나는 곧장 큰 배낭을 찾아 몽파르나스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곳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출발지.
이미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곧 길 위에서 까미노로 둔갑해 친절한 미소와 위로를 건네는 동행이 되었다.
그해 여름 한 달간, 나는 매일 걷고 또 걸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이 뻐근해지는 고통은 짧은 찰나의 기억일 뿐이었다.
정작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길 위의 풍경들이었다.
너른 평원의 갈대들, 길옆의 야생화와 해바라기, 산 위에서 바라본 하늘과 산,
마을로 이어진 작은 교회들,
그리고 무엇보다 묵묵히 걸어가는 전 세계의 순례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걷는 동안,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걸어가는 나 자신을 다시 만났다.
복잡했던 머릿속은 단순해졌다.
“오늘 어디서 자지, 무엇을 먹지.”
그 단순한 질문조차 설레었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는 발걸음은 더 이상 무겁지 않았다.
나는 가벼워졌고, 비워졌다.
매일 다섯 줄 일기를 쓰고 잠을 청한 뒤,
새벽같이 장비를 챙겨 알베르게를 나서며 맞이한 해돋이,
스페인식 카페 콘 레체로 허기를 달래던 아침은
비워진 마음에 물을 주는 순간이었다.
떠나고 도착하기를 반복했던 그 길 위의 산티아고는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한다.
이 책에는 산티아고 순례길 30일 동안 내가 본 풍경과 만난 사람들,
그리고 길 위에서 다시 만난 나 자신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누군가에겐 그냥 여행기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걷는 명상, 정신의 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