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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치앙마이 한 달 살기

일에서 내려온 두 사람과 늦둥이 반려견 둘, 네 식구의 첫 한 달 실험

by 츤데레달언니

회사를 퇴직하고 나서 순례길을 다녀와 엄청 상기된 상태의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본인도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 역시 3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했으니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을 테고,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래도 좀 참아보지,라고는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당신도 쉬어. 그동안 고생했어.

그러자 마치 모든 준비를 해놓았던 것처럼 속전속결로 사직서를 내고 각종 서류와 퇴직금 정리까지 일사천리로 마무리하더니 냉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도 속된 말로 ‘삼식이’는 아니었다. 나와는 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다르고 각자 루틴도 달라, 그저 각자 약속 없을 때 저녁을 같이 먹는 정도였다.


그는 아침을 정말 잘 보냈다. 충분히 자고 늦게 일어나 운동을 가고, 늦게 아점을 먹는 정도였는데, 워낙 올빼미형이었기에 30년간 고되게 아침형 인간처럼 살다가 그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결혼 후 처음으로 평일의 낮을 같이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서 한 달 살기를 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들의 늦둥이 반려견 둘을 데리고 말이다. 혹여 둘 중 누군가 재취업을 한다면 또다시 몇 년간은 평일의 낮을 함께 감상할 수 없을 테니, 곧 겨울이니 따뜻한 동남아를 생각했고, 최근 글로벌 디지털 노매드에게 인기 있다는 태국의 치앙마이로 선택했다.

가족이 다 같이 떠나는 한 달 살기는 의외로 비용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한국에서 쓰던 생활비를 그대로 그곳에서 쓰면 되니, 호화로운 호텔 생활만 포기하면 그저 식비와 그 나라의 경험에 대한 비용일 뿐이었다. 게다가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태국이었으므로.


우리는 치앙마이의 반려견 동반 가능한 숙소, 작은 아파트를 찾아 한 달을 예약하고, 반려견이 무사히 정착할 수 있도록 각종 예방주사와 검사지를 준비했다. 이민 가방에 가득히 한 짐을 싣고 떠났다.

반려견 동반 공항.jpg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저 엄마 아빠와 같이 가는 여행이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눈으로, 무한 신뢰를 보내며 얌전하게 비행을 했다. 안 그래도 귀가 예민한 동물인데 비행기 고도의 압력을 참으며, 비행기 안의 한 승객으로 6시간을 태국까지 같이 날아갔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것은 이 아이들이 얌전해서도, 압력을 잘 견뎌서도 아니었다. 실은 이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는 큰 스트레스였나 보다. 태국에 도착해 보니, 케이지 안에서 압력의 고통을 느낄 때마다, 비행 소음을 들을 때마다, 많은 승객들이 뒤엉킨 냄새를 맡는 것이 행복할 리 없었을 것이다. 자기 발을 핥다가 다리에 듬성듬성 털이 한 움큼 빠진 채로 나왔다.


태국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한국 수의사와 화상 통화를 했다. 들은 이야기는,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 탈모증 증세라는 것. 가지고 갔던 예비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아 더 이상 핥지 못하게 하는 응급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대체 누구를 위한 여행이었는지,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한숨과 미안한 감정이 같이 올라온다.

치앙마이 아가들.jpg

그러나 어른들, 즉 남편과 나는 정말 치앙마이를 그다음 날부터 바로 즐기기 시작했다. 각자가 좋아하는 운동 클래스를 한 달 등록하고, 삼시 세끼 로컬 음식을 탐색하는 일과를 보냈다.

새벽 요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나의 눈길을 끄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었다. 자판에 이것저것 로컬 음식을 벌여 놓고 파는 노점이었다. 치앙마이는 덥기 때문에 바로 음식을 해서 파는데, 직장인들의 아침이 되기도 하고, 점심 도시락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카오톰 까이'라고 하는, 닭을 푹 고아 끓여서 밥과 같이 내는 묽은 닭죽은 우리 집의 정규 아침 메뉴였다. 그리고 접시 가득 수박, 망고, 용과, 두리안 같은 동남아 과일들을 먹고 치앙마이의 블랙티 혹은 화이트 티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이국적인 건강함으로 속이 가득 차서 행복이 밀려온다.

치앙마이 음식.jpg
치앙마이 과일.jpg


그 행복이 배가 부른 데서 오는 1차적인 행복이라기보다는,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에서 떨어져 느끼는 여유와, 우리의 치열했던 지난 시절을 일단 잘 마감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시간의 구애 없이 입안에서 충분히 느껴지는 과일과 차의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이 시간이 행복했던 것이다.


마치 우리는 정지되어 있는 듯하고, 우리를 둘러싼 다른 이들은 바쁜 출근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길게 늘어선 자동차들, 숨 막히는 지하철, 커피를 들고 쏜살같이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우리를 뺀 사람들을 한 번 그려보면서, 우리는 치앙마이의 매일 아침을 우리만의 굿모닝으로 만들고 있었다.

치앙마이 아침.jpg 치앙마이 아침


치앙마이의 하루하루도 시간이 가는 속도로 지나간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안에서 멈춰 있었다. 완벽한 휴식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치앙마이의 굿모닝에 이어, 치앙마이의 낮과 밤은 생각보다 다이내믹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치앙마이 탐구하기.’ 쉬어도 되는데, 우리는 결국 또다시 탐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보기보다는 할 일을 참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도시였다, 치앙마이는.

치앙마이 전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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