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3)
일모도원(日暮途遠) :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고대 중국에서 양자강 이남의 땅은 춘추 시대 이전까지는 오랑캐의 영역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비옥한 토지에 힘입은 이 지역의 생산량 증대로 양자강 이남에서 할거하던 초나라가 마침내 중원을 위협하는 패권국가의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중원과의 물적 인적 교류가 활발해지자 초나라에 이웃한 오나라와 월나라까지도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초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했던 오자서는 왕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아버지와 형이 초 평왕에게 살해당한 후 이웃 나라인 오나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때마침 오나라 왕실에서도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자 오자서는 야심가인 공자 광의 빈객으로 들어가 그를 도와 왕위를 차지하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공자 광이 기원전 515년 오나라의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춘추오패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 오왕 합려이다. 합려는 기원전 512년, 오자서를 장군으로 삼아 초나라와의 전쟁에 나섰다. 6년간의 전쟁 끝에 초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오자서는 이미 고인이 된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다 무려 300번이 넘는 매질을 해댔다. 오자서의 어릴 때 친구인 신포서가 이를 전해 듣고는 복수가 너무 지나치다며 오자서를 나무랐다. 친구의 질책을 받은 오자서가 분연히 답하였다. “나이 들어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나 해야 할 일은 많고 마음이 급하니 도리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日暮途遠 倒行逆施).”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일모도원으로 할 일은 많은데 주어진 시간이 넉넉치 않은 상황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와신상담(臥薪嘗膽) : 강국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오왕 합려는 재위 19년쨰인 기원전 496년, 오나라의 남쪽에서 힘을 키워가고 있던 신흥 강국 월나라와의 전쟁에 나섰다. 월나라의 융성을 주도했던 월왕 윤상의 죽음을 알고 권력의 공백을 노린 공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능가하는 영걸이었던 새로운 월왕 구천은 오자서와 같은 초나라 출신 재상 범려의 도움에 힘입어 오나라의 공격을 물리쳤다. 오왕 합려는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했을 뿐 아니라 패주하는 과정에서 발가락에 입은 상처가 도져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합려는 죽음에 이르러 태자인 부차를 불러 구천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차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3년 이내에 구천에게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이후 부차는 편안한 잠자리를 외면하고 장작 더미 위에서 자면서(臥薪) 월나라를 상대로 한 복수전을 준비하였다. 오자서의 보좌를 받아 재위 2년만인 기원전 494년, 월나라와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부차는 회계산이라는 곳으로 구천을 몰아넣었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이 기회에 구천을 죽이고 월나라를 멸하라는 진언을 하였다. 그러나 월나라 재상 범려의 이간계에 놀아난 부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오자서를 문책하여 죽게 만들었다. 죽다 살아난 구천은 쓰디 쓴 곰의 쓸개를 매일 핥으며(嘗膽) 설욕전을 준비한 끝에 마침내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하고 궁지에 몰린 부차는 자결하였다. 죽음을 앞둔 부차는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달라 했는데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저승에 가서 무슨 낯으로 오자서를 보겠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와신상담은 부차와 구천이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일종의 각성제 역할을 했던 셈인데 결과만 놓고 본다면 와신보다는 상담의 각성 효과가 더 강렬했던 것 같다.
토사구팽(兎死狗烹) : 오자서와 범려는 둘 다 초나라 출신으로 각각 오나라와 월나라로 망명하여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누렸으나, 둘의 말년은 판이하게 달랐다. 일모도원의 고사에서 보듯 시체에도 무자비한 매질을 서슴지 않았던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다운 불 같은 성격으로 왕의 앞에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 그러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책략가였던 범려는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련 없이 자리에서 물러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범려는 은거하기 전 또다른 동료 재상인 문종에게 자신들이 모시는 월왕 구천은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으나, 부귀영화를 같이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 평하였다. 그러면서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재빠른 사냥개는 삶겨 죽는(狡兎死 走狗烹) 것이 세상 이치이니 해를 당하기 전에 같이 은퇴할 것을 권유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뒷간 갈 때와 나올 때 마음 다르다.”라는 우리 속담과 비슷한 의미인데 필요할 때는 요긴하게 쓰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야박하게 버리는 세태를 비꼬는 말로 자주 쓰인다. 참고로 범려의 충고를 흘려 들었던 문종은 결국 범려의 예언대로 구천의 버림을 받아 자결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불감청이나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 산동반도에 위치한 제나라는 주 무왕의 재상으로 개국공신이었던 강상(姜尙)에게 봉해진 나라였다. 제나라는 약육강식의 시대인 전국 시대의 개막과 함께 중신인 전(田)씨가 왕위를 찬탈하여 강제(姜齊)와 전제(田齊)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나라는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에 공히 해당하는 강국으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마지막에 가서야 함락시킬 수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는 당시 굴지의 대도시로 그 번화함에 있어서는 진의 천하통일 이후에도 수도인 함양 못지않았다고 한다. 임치를 둘러싼 성곽의 둘레만 20km에 달했으며 성문은 13개나 있어 말 그대로 사통팔달의 구조를 자랑했다. 전국 시대인 기원전 4세기 중엽, 제나라는 임치의 서쪽 성문인 직문(稷門) 근처에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지어 천하의 저명한 학자를 초빙하였다. 직하학궁에 모여든 학자들을 직하학사(稷下學士)라 칭하였는데 맹모삼천지교의 고사로 잘 알려진 맹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산동반도 출신이었던 맹자는 제나라 선왕의 부름을 받아 제나라로 향하였으나, 본인에 대한 왕의 대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제나라를 떠날 결심을 하였다. 제나라 선왕은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나 민본주의가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점이 못마땅해 맹자를 중용하지는 않았으나, 맹자의 당당한 태도와 고매한 인품은 높이 사고 있었다. 떠나려 하는 맹자의 집으로 직접 찾아간 선왕이 맹자에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를 물었다. 이에 대한 맹자의 대답은 “감히 만남을 청하지는 않겠으나 저 역시도 원하는 바입니다(不敢請 固所願).”였다. 비록 자청해서 왕을 다시 만나자 하지는 않겠지만 왕이 만나자 한다면 자신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답변이었다. 한 마디로 내심 해주기를 바라지만 체면 때문에 대놓고 말을 못하는 것이 바로 불감청이나 고소원의 의미라 하겠다.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라는 것인데 동양의 유교문화에 녹아 있는 이런 소극적 태도가 근세사회에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원인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명구도(鷄鳴狗盜) :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晉)나라를 한(韓)씨, 위(魏)씨, 조(趙)씨 등 세 명의 가신들이 삼분하면서 시작된 전국 시대에는 ‘전국칠웅(戰國七雄 : 진(秦), 초(楚), 제(齊), 연(燕), 조(趙), 위(魏), 한(韓))’이라는 7대 강국에 의해 천하가 재편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각 나라의 권력자들은 인재 양성을 통해 국가 간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경쟁적으로 인재 확보에 나서게 되는 데 이 중 유명한 이들을 전국사군(戰國四君 :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초나라의 춘신군, 위나라의 신릉군)이라 불렀다. 이 전국사군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 제나라의 왕족 출신인 맹상군으로 그가 거느린 식객의 수만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기원전 299년, 진시황의 증조부이면서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닦은 진(秦)나라 소양왕은 맹상군의 명성을 듣고 그를 진나라로 초청하여 재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소양왕의 신하들은 맹상군이 제나라 왕족 출신임을 들어 결국에는 진나라보다는 제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라면서 그의 등용을 반대하였다. 신하들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소양왕은 차제에 맹상군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 버리자는 결정을 하였다. 졸지에 죽을 위기에 몰린 맹상군은 데리고 온 식객들과의 의논 끝에 소양왕이 아끼는 후궁을 통해 구명운동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후궁이 로비의 대가로 여우 천 마리의 겨드랑이 털을 모아 만든 외투인 ‘호백구(狐白裘)’라는 보물을 요구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맹상군이 진나라로 올 때 호백구를 가지고 오기는 했지만, 이미 소양왕에게 이를 선물한 뒤였기 때문이다. 이 때 평소 식객 중 밥값을 못하였던 개 흉내를 내어 도둑질하는(狗盜) 건달이 나섰다. 맹상군은 이 식객 덕분에 소양왕의 보물 창고에서 호백구를 훔쳐 후궁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뇌물을 받은 후궁의 간청으로 소양왕이 맹상군을 풀어주자 맹상군은 일행과 함께 서둘러 귀국길에 나섰다. 자유로운 몸이 된 맹상군은 소양왕의 변심이 두려워 일행과 함께 진나라 국경인 함곡관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그러나 함곡관에 도착한 때가 한밤중이어서 닭의 첫 울음 전에는 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진나라의 법에 따라 새벽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고 낙담하게 되었다. 소양왕은 맹상군의 예상대로 맹상군을 풀어준 것을 곧바로 후회하고 추격하기 위한 군사를 보낸 참이었다. 이 때 또다른 식객 중 동물 울음 소리를 잘 내는 이가 닭의 울음 소리를 흉내(鷄鳴) 내자 문지기가 새벽인 줄 알고 관문을 열어 주어 맹상군 일행은 무사히 제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계명구도라 함은 하잘것없는 재주를 가진 사람도 때에 따라서는 쓸모가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단오(端午) : 음력 오월 초닷새날을 의미하는 단오(端午)는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이 멱라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날이라고 한다. 굴원이 섬기던 초나라 회왕은 진(秦)나라를 상대로 영토 분쟁을 벌이던 중에 진나라 소양왕의 책략에 휘말려 진나라에 갔다가 억류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왕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었던 초나라의 신하들은 그래도 비교적 말이 통하는 또다른 강국 제나라를 설득해 볼모로 가 있던 태자를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기원전 298년, 볼모 신세에서 풀려난 태자가 즉위하여 경양왕이라 칭하였는데 이후 초 왕실에서 실권을 장악한 이는 경양왕의 옹립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동생 자란이었다. 자란은 반진파(反秦派)의 대표적 인물이면서 직정경행(直情徑行)하는 성격의 굴원을 미워했다. 그 이유는 초 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된 것이 친진파(親秦派)인 자란의 책임이라고 굴원이 끈질기게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자란은 또 다른 친진파인 상관대부 근상을 통해 굴원을 모함하게 해 이에 넘어간 경양왕은 굴원을 양자강 이남의 어촌으로 추방해 버렸다. 본인의 불운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한탄하던 굴원은 ‘이소(離騷)’나 ‘천문(天問)’과 같은 명문들을 후세에 남기고 멱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하였다. 중국에서는 굴원이 자살한 음력 5월 5일 단오를 ‘굴원일(屈原日)’이나 ‘시인절(詩人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인들은 단오에는 연잎이나 댓잎으로 찹쌀과 고기를 싼 쫑쯔(棕子)란 음식을 강에 뿌리는데 이는 우국지사의 표본이라 할 굴원의 시체가 물고기밥이 되는 것을 염려해서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