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Edition
<이 남자, 요리가 되네?>의 첫 여정을 마무리하고 나니, 허전함과 함께 조용한 숨이 돌았다. 올해 봄 미리 계획해 둔 여행에 맞추어 쉼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급히 마무리해야 하는 원고들을 정리해서 넘기고, 지역구 여성가족 플라자에 올릴 홍보글 기획안과 콘텐츠를 미리 보냈다. 마감 날까지 여유는 있었지만 서둘러 마무리했다. 여행에만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지난 한 달간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탓에 번 아웃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로 인해 4월에 다친 부위가 여전히 불편해서 우울하기도 했다. 쉼과 회복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과 나는 딸내외가 살고 있는 싱가포르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갔다. 추석 연휴가 지나서인지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비행기에도 빈좌석이 많았다.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비행시간은 6시간으로 꽤 길었다. 막 비행기를 오르려는데 이메일을 받았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딸내외를 만날 때는 모든 것을 잊고 여행에만 집중하려고 그렇게 서둘렀는데 큰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내 와이파이'가 생각났다. 얼른 구매를 했고, 덕분에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참 편한 세상이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밖으로 나와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하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릿해서 살짝 울컥했다. 그동안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 위해 했을 노력과 그 마음이 짠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정을 시작해서 약 12일 동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발리를 여행했다. 모든 곳이 다 새로웠고 즐거웠다. 많은 액티비티 중 특히 발리에서 'Peppers Seminyak Hotel Cooking Class' 에 참가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도네시아 발리 요리 체험을 위해 쿠킹클래스에 예약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굳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시큰둥했던 마음은 요리 수업에 늦을 뻔한 순간부터 달라졌다. 여유 있게 출발했지만, 꽉 막힌 도로에 갇혀 우린 그랩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 괜찮을 거야." 서로를 다독이며 웃던 그때부터, 어쩌면 우리의 쿠킹클래스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우리를 본 메인 셰프는 반갑게 맞아 주었다.
“Perfect timing! You are just in time.”
다행히 그날의 참가자는 우리 가족 넷뿐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웰컴 드링크로 내어온 것은 루비빛 주스였다. 히비스커스일까? 로셀라일까? 새콤하면서도 은근히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조금 전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듯했다. 마음이 편안해지자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국적인 호텔 인테리어를 보는 순간, '아, 우리가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구나' 새삼 실감했다. 테이블 위에는 정갈하게 손질된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와 색색의 채소들을 바라보며, '이걸로 우리가 어떤 요리를 만들게 될까'궁금해졌다.
자~ 이제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 요리를 소개할게요!
향의 시작, 붐부 발리
붐부 발리는 단순한 향신료 이름이 아니라, 발리 전통 요리의 핵심 베이스 소스이다. 모든 인도네시아 발리 요리에는 거의 이 양념이 들어간다.
잘 준비되어 있는 쿠킹 클래스, 납작한 손돌과 거친 돌판도 있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우레칸(ulekan)’이라 부른다고 했다. 절구통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돌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향신료를 으깰 때 쓰는 요리 도구이다.
테이블 위에는 샬롯, 마늘, 생강, 강황, 레몬그라스, 고추, 트라시(새우젓), 닭다리살, 튜나가 놓여 있었다.
샬롯과 마늘, 생강, 강황, 레몬글라스를 잘게 썰어 돌판에 올리고 몸의 중심을 실었다. 돌이 미끄러지며 재료들의 향이 올라왔다. 강황의 노란빛, 생강의 따뜻함, 레몬그라스의 상큼함이 공기 속에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하지만 곧 팔에 힘이 빠졌다.
“이건 요리가 아니라 운동이네.”
남편이 웃었고, 딸은 방아를 밀다 말고 어깨를 내렸다. 사위도 제법 힘들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요령이 없었다. 그러자 셰프와 보조선생님들이 다가와서 시범을 다시 보여줬다.
“push…pull.. not hit.”
그들의 손끝에서 움직이는 리듬이 전해져 왔다. 돌 위의 재료들이 조금씩 하나로 섞여 갔다.
셰프가 웃으며 말했다.
“인도네시아 여자들은 이 방아질을 자주 해서 팔에 근육이 많아요. 남편이 화를 내거나 말을 안 들을 때 이 근육이 참 많은 도움이 됩니다.”
모두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나를 보며 물었다.
“당신도 그런 순간이 있나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끔은요.” 동의 못하는 1인을 빼고 우리 모두는 웃었다.
셰프의 도움으로 붐부 발리를 완성했다. 각자의 붐부 발리는 한 곳으로 모아 두었다.
'Bumbu'는 인도네시아어로 '향신료 페이스트' 또는 '양념'이라는 뜻이고, 'Bali'는 발리섬(Bali)을 의미한다.
그래서 Bumbu Bali'는 발리식 향신료 양념 페이스트"이다.
사테 릴릿 이칸(Sate Lilit ikan)
잘게 다진 생선에 코코넛과 향신료를 섞어 레몬 그라스 줄기에 감아 굽는 발리 전통 꼬치요리
발리에서는 특히 질 좋은 생선살(주로 튜나)을 다져서 사용한다. 여기에 붐부 발리, 코코넛채, 팔름슈거를 섞어 반죽을 만들어 절구에 찧는다. 찧는 과정은 재료가 잘 섞이도록 도와주는 전통 방식이다.
'Lilit'은 인도네시아어/발리어로 '감다', '둘러싼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 반죽을 레몬그라스에 감아 바나나 껍질 위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여유분은 한국의 동그랑땡처럼 만들어 중앙을 납작하게 눌러 다른 한쪽 바나나 잎에 올려 두었다. 모두 준비되자 미리 예열을 해 둔 오븐에 넣고 노릇노릇 구워 냈다.
페레스 아얌(Pepes Ayam) : 향신료에 재운 고기를 바나나잎에 싸서 구운 발리 전통 요리
“이제 발리 음식도 하겠는 걸” 남편이 하는 말에,
“이건 거의 레스토랑 수준이네. 나보다 더 꼼꼼하게 잘 감쌌네요~” 칭찬 한 마디 덧붙였다. 불 위에서 익어가는 사테와 함께 우리들의 웃음도 익어갔다.
달콤한 끝, 림팡 림풍
마지막은 림팡 림풍(Limpang Limpung) 바나나 튀김이었다. 이건 인도네시아 특히 발리 지역에서 즐겨 먹는 전통 간식이다. 달콤하고 바싹한 디저트이다.
1. 밀가루, 쌀가루, 설탕, 팔름 슈가, 소금, 바닐라 엑스트랙을 넣고 섞는다.
2. 여기에 코코넛 밀크를 조금씩 부어가며 되직한 반죽을 만든다( 팬케이크보다 약간 묽은 정도가 좋다).
3. 바나나를 길게 썰거나 어슷썰기(살짝 단단한 것이 좋다).
4. 노릇하게 튀기기
5. 키친타월 위에 올려 기름기를 뺀다.
6. 꿀이나 시럽, 코코넛 파우더를 뿌려 플레이팅 한다.
아래 두 가지 요리는 여분의 재료들을 이용해서 만든 요리들이다.
*Kalasan Ayam Suwir
삶은 닭고기를 가늘게 찢어서 여러 가지 향신료등과 함께 볶은 요리.
*Sop Ikan
신선한 생선을 향신료와 채소로 끓인 발리식 생선 수프. 라임과 레몬그라스의 향이 어우러져 맑고 상큼한 국물 맛이 특징이다.
호텔에서 준비해 준 밥.
모든 요리가 완성되자 테이블 위에 잘 차려져 나왔고, 우리는 저녁으로 먹었다.
처음 요리를 시작하면서 셰프는 매번 맛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조심스레 맛을 보았고, 이 정도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먹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듭될수록 향이 강하게 느껴지고 감동이 무뎌져 갔다. 분명 발리의 음식은 맛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메인 요리에 들어가는 붐부발리나 향신료들이 다소 과하게 느껴져서 많이 아쉬웠다. 쿠킹클래스의 특성상 여러 가지 요리를 한꺼번에 체험해야 해서 어쩔 수 없지만 각각 따로 맛을 보았더라면 훨씬 더 후한 평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밥이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개인 취향입니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조금 특별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거쳐 도착한 발리에서의 일정은 단지 관광이 아니라, 느끼고 배우고 경험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쿠킹클래스 역시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함께 재료를 썰고, 불 앞에 서고, 맛을 보며 웃던 그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있다는 것'이 주는 따뜻함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중심에는 우리 딸이 있었다. 모든 일정을 계획하고, 예약하고, 우리를 위해 하나하나 준비해 준 건 딸이었다. 우리가 불편하지 않게, 더 많이 보고, 느낄 수 있게끔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이 대견하고 고마웠다. 늘 내가 챙기기만 하던 아이가 이제는 부모를 이끌고 돌보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벅찼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여행자라기보다, 서로에게 조금 더 다가서는 동행자였다. 같이 걸으며 나눈 대화, 식탁 위의 웃음, 그리고 잠들기 전의 잔잔한 고요까지 그 모든 것이 우리 가족의 또 다른 기억이 되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때의 공기와 햇살, 향신료의 향이 다시 떠오른다. 낯선 곳에서 배운 건 요리법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웃는 법이었다. 그 시간들이 내 안에 조용히 남아, 하루를 조금 더 풍요롭게 한다. 이번 여행은 그렇게 내 마음에 오래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