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이의 계절이다 .
저녁,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로수 옆을 지나가가 보이지 않는 실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애벌레를 보게 되었다. 까맣고 통통한 몸체에 빨갛게 빛나는 두 눈, 그리고 솜털처럼 가지런히 나 있는 섬모. 발인지 털인지 알 수 없는 배 쪽의 진한 털 사이로는 노오란 줄이 화려하게 몸 둘레를 장식하고 있다. 그냥 보면 괜찮을법한 색들이 묘하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도록 구성되어 있다, 나뿐이 아니라 새들도 혹은 다른 어떤 천적도 그렇게 으끼겠지. 맛없겠다, 혹은 독이 있을것 같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송충이 (혹은 애벌레와 같았던 기다란 벌레) 와의 짧은 만남은 내가 6살 때 서울에 처음 올라와 마주했던 송충이와의 끔찍했던 기억을 빠르게 끌어올려왔다. 바다 속 깊이 잠겨있던 작은 플라스틱 풍선비닐에 누가 바람을 주입해 표면위로 쑥 끌어올려 낸 것만 같다. 공덕초등학교 운동장, 솔숲길 옆 인도로 끌려간 7살의 나.
6살 혹은 7살 전의 기억은 연필로 쓰였다가 고무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지워진 것만 같아, 희미하게 남은 자욱들이 이따금 존재를 드러내지만 그 중에서도 이 송충이라는 녀석은 끈질기게 남아 종이와 혼연일체가 되어 자욱이 아닌 음각으로 새겨진 모양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처음으로 가봤던 학교. 내년이면 학교에 간다는 생각으로 들떴던 어린이는 실제로는 이사를 가게 되는 바람에 그 학교에 입학하지도 못했지만, 그런 내용일랑 미래라서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던 모습으로 “우리 학교” 에 가보고 싶었다. 내년이면 국민학생이라지. 한껏 들뜬 꼬마는 겁도 없이 성큼성큼 육교를 건너 학교 운동장에 혼자 들어섰다.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놀고있던 다른 어린이 언니오빠들이 시끄러웠다. 축구공을 뻥뻥 차는 남자어린이들을 피해 7살 꼬마는 운동장 한켠의 인도에 있는 벤치에 자리잡고 앉았다.
꼬마는 한참동안 운동장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던 것 같다. 학교에 다니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집에서는 걸어서 30분 정도는 걸리는 것 같은데. 교실에 들어가면 재밌겠다.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것도 빨리 해보고 싶네… 하고 생각하던 찰나, 뭔가 머리와 어깨에 툭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나뭇잎 같은 거겠지 하고 손으로 툭 털어내던 순간, 손에 닿는 섬칫한 느낌에 꼬마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펄떡 뛰어 일어나고 말았다. 뭐야, 이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과학앨범에서 사진으로나 보던 송충이들이었다. 몸이 통통한 것이 새끼손까락 굵기만은 한 것 같았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송충이다. 검정 노랑 빨강 초록 색동옷을 입었다. 콘크리트 블록으로 된 인도에 깨를 뿌린 듯 송충이가 구물거리고 기어다니고 있다. 그때였다, 꼬마 주변 나무 아래에는 어떤 어린이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참 착한 어린였다. 모범생에 부모님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아이. 그렇지만 착하다는 건 뭘까. 어린이의 잔인성은 착함과는 별개의 이야기이다. 지금 떠오르는 나만의 기억은, 어디까지 기억 의존적지만, 그 근방에 있던 송충이들을 모두 밟아 죽이기 시작했다. 발작적인것 만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납작하게 밟혀 육즙이 터져나간 송충이 시체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른의 시점에서 보자면 어린이 사이코패스의 살육의 현장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학교에 다시는 가지 읺았다. 가족이 모두 이사하는 바람에 그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걸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의 잔인성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생각의 폭이 깊지 못해 드러나는 천진무구한 맑은 악은 나에게는 송충이 잔혹살해 현장으로 기억되고, 가능하면 떠오르지 않도록 기억회로 저 깊이 묻어두고 바위로 눌러두고 있는 것이다. 이따금씩 송충이들이 예고없이 눈앞에 나티날 때면 수면위로 올라와 터져버리는 그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