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여탈권

by 하름구늘


저는 당신을 신으로 받들어 추앙할 수 있습니다.

그 숭고한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신을 받들어 숭배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열심히 경배하는 일이 뭐 어려울까요. 이 사람을 내가 신으로 만들었는데, 그 신을 숭배하는 일은 성배를 마시는 듯 달기만 했어요.

해서 당신이라는 그 성역으로 들어가 저를 심고 오는 일은,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고, 조금 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들뜨는 감정이라고 해야 하나요. 묘한 뿌듯함도 공존했습니다. 그만큼 투명한 마음으로 당신께 닿으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심다 라니, 저라는 흔적이 과연 심겼을까요? 심었다고는 해도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그런 구석의 흔한 땅조각으로 남았으려나요. 당신께서는 제 존재가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저만의 마음으로 당신께 저를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천천히 저를 녹이면 되니까요. 여름날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처럼, 그렇게 눅진한 자욱을 만들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녹아도 괜찮았습니다. 그곳에 녹아있을 제 잔재를 기억해주시기만 한다면. 당신은 구태여 걸음을 옮기지 않으셔도 되었고, 저는 그 순간에 함께 할 수 있음에 행복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괜찮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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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주실 수 있는 신도에 대한 애정은 존재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해서 당신께서 제 보금자리로 들어오시는 일은 견디지 못했습니다. 항상 제가 당신의 곁으로 갔고, 저의 세상을 보여드리진 않았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에 당신을 심을 순 없었습니다. 아주 깊이 뿌리내리실게 분명하니까요. 그 깊은 뿌리에 발이 걸려 매일을 넘어질 제가 눈에 훤히 보이니까요. 시선이 닿는 곳 하나하나에 마음이 걸려 그대로 넘어져버릴 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아주 작은 제가 뿌리를 내리려 했습니다. 저는 당신께 언제까지고 쉬이 뿌리를 뽑을 수 있는 새싹일 테니.

차라리 다행일 성싶습니다. 언제든 뽑을 수 있는, 밟히기만 해도 아스라 져버리는, 그런 새싹이어서 다행입니다. 연약한 뿌리를 쉽게 뽑아 잡초를 정리해서, 다시 당신의 세상을 정돈하시는 것이 제게도 오히려 다행일 듯합니다. 그 과정은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걸음만 옮겨도, 발만 굴러도 밟혀 없어질 그런 작은 존재이니까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조금 우습네요. 언제고 당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제 운명이려나요.


신앙심이 깊어져 더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해, 이제 한 걸음씩 성역을 벗어나려 합니다. 제 신앙은 여기까지로 하려 합니다. 광신도를 자처하기엔 제가 숭배하는 신께서도 바라지 않으실 듯하니, 조금씩 벗어나야겠습니다. 고행길이어도 괜찮습니다. 그 고행길에 오를 시간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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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당신을 신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숭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신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그 신의 생사여탈권은 제게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이제 이만 내려놓겠습니다. 당신은 신이 아니시고, 멋대로 당신을 숭배한 제 잘못입니다.


이제야 저는 당신의 이기심에 빚지지 않고, 당신이 계신 성역으로 들어가, 제 마음으로 당신을 숭배하고, 작은 뿌리를 심어 놓은 채 저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정말 그래야겠습니다.



신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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