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의 꿈에 첫사랑이 나온 이유

by 현솔

얼마 전 매우 불경스러운 꿈을 꿨다

아, 혹시 다른 걸 기대하고 있다면 그건 아니다

아쉽게도 아주 건전한 꿈이었다

그렇다면 왜 불경스럽다고 느꼈을까?


사실 그 꿈엔 첫사랑이 나왔다.

내용은 흐릿했지만 잔상은 강렬했다

9살 아들이 있는 유부녀 꿈에

첫사랑이 나오다니, 이 무슨 주책인가

(미리 말해두자면, 우리 부부는 '아직' 다정하다)


자, 다시 첫사랑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꿈에 나온 그 친구는 내 짝사랑 상대이기도 했다

수년간 홀로 속앓이를 해온 끝에 쟁취해 낸 사랑이었다


그 아이를 처음 본 건, 스무 살.

고3이 남긴 후유증을 그대로 안고 대학에 입학했던 때였다.


교내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그 아이가 걸어왔다
횡단보도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멀대 같은 아이.
다소 뻔한 표현이지만 진짜 후광이 비치더라
요즘 말로 나는 얼빠였던 게 분명하다


당시 우리 과는 그 특성상 감수성이 풍부한 남자들이

꽤 있었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더 특별했다.


F력 99%.

이제 막 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햇병아리 주제에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했고

아픈 가족사를 고백하며, 내면의 상처를 터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또 플러팅은 어찌나 해대는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나에겐 정확히 먹혀들었다


쓰다 보니

걔가 왜 첫사랑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아이는 잘생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나의 첫사랑이 된 그.

하지만 그 기간은 아주 찰나였다

헤어짐을 고한 그 아이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보자며 포옹해 줬고

내 행복을 빌며 그렇게 떠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별까지도 플러팅이었다. 나쁜 놈


그 이후엔 그 아이를 만날 수 없었다

우연이라도 마주쳤으면 했었지만

같은 과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스치지도 않더라

어쩌면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르지.


나는 꽤 오래 아팠다

많이 울었고, 자주 떠올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 슬퍼했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 결혼도 했으니

이 지긋지긋한 첫사랑, 이제 그만 좀 생각나도 될 텐데

왜 아직까지도 꿈에 나오는 걸까?


많은 이들의 첫사랑은 그냥 그 자체로 특별하다지만

나의 경우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상화'와 '그 시절의 진심'


내가 더 많이 좋아했고

미완으로 끝난 관계이기에 아쉬움은 더 진하게 남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흐릿해진 건 아픈 기억들뿐

그의 장점과 좋은 추억들은 더 선명하게 덧칠됐다

꼭 형광펜으로 그어놓은 밑줄처럼.


거기에 '첫사랑'이라는 단어 자체의

무게까지 더해지니 더 미화되고, 이상화되는 게 아닐까?


또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첫사랑을 떠올리는 건, 그때 그 시절의 내가 그리운 거야'


그때의 나는

길치, 방향치라는 생물학적 핸디캡을 가지고도

무작정 기차에 올라타는 일이 잦았다

첫사랑이 타지에서 군 복무를 하는데, 그깟 거리가

무슨 대수랴. 일단 가는 거지.


잘생긴 첫사랑을 쟁취하려면 나도 예뻐져야 하니

난생처음 다이어트란 것도 해봤다

학교에서 시내까지 무려 5시간을 걸어 다녔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면

불편한 구두를 신고 있어도 무작정 함께 걸었다

뒤꿈치가 다 까지고 새끼발가락이 조여와도 괜찮았다


그렇게 그 시절의 나는, 무모하고도 뜨거웠다

그래서 더 잊지 못하는 게 아닐까.


첫사랑이 종종 꿈에 나오는 일.

남편을 생각하면 왠지 미안하긴 한데

그 애틋함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근데 내 꿈에만 나오는 건 좀 억울하니까

살다가 너도 아주 가끔은 나를 떠올리길 바라.







월요일 연재
이전 02화나는 소아비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