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행복에 대하여 2) 목표보다 과정

by 이병일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현대인이 겪는 ‘실존적 공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동물적 본능을 잃었고, 자기 행동을 지탱해주던 전통마저 와해되는 상실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 결과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공허는 대개 권태로 나타나며, 우리는 그 권태를 잊기 위해 ‘목표 달성’이라는 신기루를 쫓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정복해야 할 정상이 아니라, 그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발걸음 속에 있습니다.


원피스는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라프텔’이 아니다

만화 『원피스』에서 주인공 루피와 그 동료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대비보 ‘원피스’가 숨겨진 마지막 섬, 라프텔(Laugh Tale).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루피의 입을 빌려 행복이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샤본디 제도에서 해적왕의 부선장이었던 레일리와 나눈 대화는 이 챕터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우솝: “레일리 씨,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원피스’는 정말로 있는 거야?! 아니면... 그 섬의 끝에는 대체 뭐가...!”

루피: (단호하게 외치며) “우솝!! 보물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 마!!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물어보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모르지만 모두가 이렇게 바다에 나와서 목숨 걸고 모험하고 있잖아!!”

레일리: “할 수 있겠나, 루피? 위대한 항로는 너희들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구. 적 또한 강하지.”

루피: “여기서 아저씨한테 이야기를 듣는다면, 난 해적 같은 거 안 해. 재미없는 모험은 필요 없어!”


루피에게 행복은 보물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찾아가는 ‘재미있는 모험(과정)’자체입니다. 만약 보물이 어디 있는지 미리 안다면, 혹은 그 과정 없이 결과만 손에 쥔다면 그것은 루피에게 더 이상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항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라는 라프텔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일 뿐,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그곳으로 향하는 거친 파도와 동료들과의 시끌벅적한 잔치 속에 있습니다.


도착 오류: 팀(Tim)의 사례가 보여주는 정상의 허망함

한동안 세계 3대 명강의로, 예일대의 '죽음', 하버드대의 '정의', 그리고 '행복' 강의가 유명했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 3가지 강의와 관련된 책이 오랜기간 베스트셀러 였으니, 아마 많은 가정에 관련 책이 한두권쯤 있을것 같습니다. 이 행복 강의는 하버드 대학교의 긍정심리학자 탈 벤 샤하르(Tal Ben-Shahar)의 긍정 심리학 강의였습니다. 그는 “특정 목표에 도달하면 지속적인 행복이 보장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도착 오류(Arrival Fallacy)’라고 불렀습니다. 중국의 심리학 박사 왕옌밍은 샤하르 교수의 긍정심리학 강의를 엮은 책 『행복이란 무엇인가』에서, 팀(Tim)의 사례를 통해 이 도착 오류가 우리 삶을 어떻게 잠식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아래는 원문의 요약입니다.)


팀(Tim)의 사례 팀은 어려서부터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당시 그는 ‘일류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정말 행복해질 거야’라 굳게 믿었다. 마침내 그는 꿈에 그리던 명문대에 합격했다. 하지만 합격의 기쁨은 단 며칠뿐이었다.

곧이어 그는 다시 불안해졌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좋은’직장에만 취업하면 그때부턴 진짜 행복한 삶이 시작될 거야.’수년 후, 그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고액 연봉의 직업을 가졌지만,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생각했다. ‘아니야, 아직 부족해.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승진을 하면 그때는 정말 행복해질 거야.’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고 난 후, 그는 상담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난 평생 정상을 향해 달렸어요. 정상이 보이면 조금만 더 가면 행복해질 거라 믿었죠. 그런데 막상 정상에 서보니, 거기엔 내가 기대했던 영원한 행복은 없었어요. 그저 또 다른 정상을 향해 가야 한다는 압박감만 남았을 뿐입니다. 나는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요?”


팀은 행복을 ‘도착지’로 설정했기에, 정복한 정상은 금세 익숙한 일상이 되고 다시 결핍의 상태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반복한 것입니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님은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도구다”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는 어쩌다 한 번 오는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 오늘 마시는 커피 한 잔, 동료와 나누는 가벼운 농담, 퇴근길의 예쁜 노을 같은 ‘과정 속의 작은 행복’들을 자주 수집해야 합니다. 뇌는 ‘빈도’ 높은 작은 보상들에 의해 훨씬 더 유연하게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미니 컴포넌트의 추억: 과정이 남긴 선명한 풍경들

목표와 과정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성적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고, 어느날 술한잔 걸치신 아버지께서 기분에 취하시어, 전교 3등 안에 드는 성적으로 졸업하면 미니 컴포넌트를 사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미니 컴포넌트는 테이프와 CD로 음악을 듣던 시절, 방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꿈의 기계였습니다.


당시 몇 년 전 집에 어려운 사건이 있어 경제 상황은 좋지 않았고, 제 방도 없었죠. 과학고를 목표로 수학 학원은 다녔는데, 과외는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당시를 떠올려봐도 나는 철이 좀 빨리 든 편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그게 갖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2등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와중에 집이 이사를 했고, 아버지께서는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미니 컴포넌트가 설치된 자리, 내 방 다른 가구와 소품의 배치가 마치 며칠 전 일인 것만큼이나 생생합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은 컴포넌트를 소유했다는 ‘결과’가 아닙니다. 그 목표를 향해 밤늦게까지 혼자 공부하던 고요한 공기, 아버지가 어려운 형편에도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거운 기계를 들고 오시던 그 뒷모습 같은 ‘과정의 조각들’입니다. 결과물은 사라졌지만, 그 항해의 풍경들은 내 삶의 단단한 역량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항해를 즐기는 실력

왕옌밍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행복은 정상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고 맹목적으로 오르는 것도 아니다. 바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과정이다.” 행복은 ‘언젠가’ 도달할 목적지가 아닙니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피어나는 작은 꽃들을 발견하는 실력, 내 곁의 사람들과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기쁨을 포착하는 능력이야말로 우리가 연마해야 할 진짜 행복의 기술입니다. 행복은 목표 달성이라는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젓는 노의 리듬 속에 이미 깃들어 있습니다.

이전 09화2장 행복에 대하여 1) 알파와 베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