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실천) 관계와 나를 재건하는 기술 (1) 관계

1장 관계의 성장

by 이병일

고릴라를 보셨나요? : 1분간의 영상이 증명한 우리의 ‘눈먼’ 상태

심리학 역사상 가장 유명하면서도 당혹스러운 실험 중 하나는 1999년 하버드 대학교의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ristopher Chabris)와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가 실시한 선택적 주의력 테스트(Selective Attention Test)입니다. 실험 방식은 매우 단순합니다. 약 1분 남짓한 짧은 영상을 시청하며 흰 옷을 입은 팀이 농구공을 몇 번이나 패스하는지 세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패스 횟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영상에 몰입합니다. 영상이 끝난 후, 패스 횟수가 15회라는 것을 맞춘 참가자들에게 연구진은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혹시 영상 중간에 고릴라를 보셨나요?”

참가자의 약 50%는 “무슨 고릴라요?”라며 어리둥절해합니다. 사실 영상 중간에는 고릴라 가죽을 뒤집어쓴 사람이 당당하게 걸어 나와 화면 중앙에서 가슴을 툭툭 치고 사라집니다. 화면에 머무는 시간만 무려 9초에 달하지만, 패스 횟수(나의 목표/문제)를 세는 데 주의력을 쏟은 사람들의 눈에는 고릴라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서늘한 통찰을 줍니다. 인간은 자신이 주의력을 집중하고 있는 대상 외에는 바로 눈앞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삶의 상처와 고통이라는 ‘공놀이’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면, 우리 곁을 지나가는 수많은 회복의 신호와 관계라는 ‘고릴라’를 통째로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85년의 추적이 밝혀낸 행복의 비밀: 하버드 성인 발달 연구

무엇이 우리를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들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버드 대학교는 1938년부터 현재까지 85년이 넘는 시간 동안 724명의 삶을 추적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종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생 그룹과 보스턴 빈민가 청년 그룹이라는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출발한 이들의 삶을 80년 넘게 들여다본 끝에, 연구의 4대 책임자인 로버트 월딩어 교수는 단 하나의 선명한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부나 명예, 학벌이 아니라 바로 ‘질 좋은 관계’다.”라는 사실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고립된 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가족, 친구, 공동체와 긴밀하게 연결된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고 수명도 길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관계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등 속에 사는 불행한 관계는 이혼보다 몸에 더 해로웠으며, 50세 때 관계 만족도가 가장 높았던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한 노년을 맞이했습니다. 연구팀은 따뜻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우리 뇌와 신체를 보호하며, 심지어 고통스러운 노화의 기억조차 관계가 주는 정서적 안도감 덕분에 완화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 관계를 맺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연구진은 어린 시절 부모와의 따뜻한 상호작용이 성인기 관계 맺기의 강력한 토대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운명론적 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연구는 ‘감정을 처리하는 능력’이 후천척으로 학습될 수 있다는 희망을 함께 전합니다. 설령 어린 시절이 평탄치 않았더라도, 성인이 되어 관계 속에서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연습한다면 누구나 행복의 열쇠인 ‘질 높은 연결’을 일구어낼 수 있습니다. 결국 행복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감정을 나누고 연결되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가정의 신체예산: 개인을 넘어 공동체로

이전 챕터에서 우리는 개인의 에너지를 관리하는 신체예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큰 상처를 입은 후에는 이 신체예산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립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입으면, 그 파동은 가족 전체로 퍼져 나갑니다. 이를 ‘가정의 신체예산’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예산이 바닥나면 다른 구성원들이 이를 메워주어야 하고, 이 과정이 길어지면 가족 전체의 정서적 금고가 비어버리기도 합니다. 결국, 깨진 신체예산을 회복해나가는 것은 개인의 고군분투를 넘어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역할이 됩니다.


관계라는 접착제: 스마트폰이 해줄 수 없는 일

어떤 이들은 상처를 입으면 혼자만의 동굴로 숨어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유튜브 쇼츠를 넘기거나 SNS를 정처 없이 떠돌며 시간을 보냅니다. 뇌는 잠시 자극적인 영상에 몰두하며 고통을 잊는 듯하지만, 이는 진정한 휴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마트폰을 통한 ‘가짜 연결’은 고립감을 심화시키고 남아있는 신체예산을 더 빠르게 갉아먹을 뿐입니다.


기분 좋은 취미 생활이나 맛있는 음식도 일시적인 위안은 될 수 있습니다. 기분 좋은 취미를 한다고 해서 이미 깨진 저금통이 다시 붙지는 않습니다. 깨진 저금통 조각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고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유일한 접착제는 오직 ‘관계’로부터 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사회적 완충 효과(Social Buffering)라고 부릅니다. 버지니아 대학교의 제임스 코언(James Coan)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처리하는 뇌 부위의 활동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관계는 단순한 심리적 위안을 넘어, 우리 뇌와 몸의 생물학적 시스템을 진정시키고 복구하는 실질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때때로 가족과 대면한다는 것은 불편한 상황과 감정을 감수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더라도 포기하거나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야 할 때와 개입해야 할 때를 유연하게 고민하며 서로를 외면하지 않는 것 자체가 강력한 접착제가 됩니다.


회복의 접착제가 된 순간들: 두 가지 이야기

에피소드 1: “아빠, 우리 팀이잖아”
오랜 시간 준비했던 시험에서 낙방하고 자책하며 한 달간 방에 틀어박혀 있던 E씨. 그는 매일 유튜브만 보며 세상과 담을 쌓았습니다. 어느 날, 어린 딸이 방으로 들어와 그의 옆에 삐뚤삐뚤하게 그린 그림 한 장을 내려놓았습니다. “아빠, 우리 가족은 다 한 팀이야. 아빠가 속상하면 나도 속상해.” 딸아이의 그 순수한 ‘연결’의 한마디는 E씨가 스마트폰 속 세상에서 나와 다시 가족이라는 현실의 온기를 느끼게 한 결정적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에피소드 2: 침묵 속의 지지
심한 직장 내 괴롭힘으로 퇴사한 후 사람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F씨. 그녀를 다시 일으킨 건 오랜 친구의 끈질긴 배려였습니다. 친구는 무언가 조언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찾아와 함께 동네 공원을 조용히 걸어주었습니다. 스마트폰 액정 너머의 자극이 아니라, 곁에서 들리는 친구의 숨소리와 보폭이 그녀의 무너진 정서적 금고를 조금씩 채워주었습니다. 타인의 존재 그 자체가 깨진 저금통의 틈을 메우는 가장 단단한 풀이 된 셈입니다.


다시 나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

관계를 통한 성장은 단순히 ‘남과 잘 지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 시야를 나라는 좁은 감옥에서 해방시켜 타인과 연결하는 것, 그리고 그 연결망을 통해 서로의 부족한 신체예산을 채워주는 과정입니다.


상처로 인해 신체예산 저금통이 박살 났다면, 이제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아야 합니다. 당신 곁에는 기꺼이 접착제가 되어줄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주의력을 나누어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다시 나아가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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