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회복탄력성의 2가지 원칙

by 이병일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 뇌가 기억하는 슬픔의 무게

가정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거대한 파도가 덮치고 나면, 우리 몸의 신체 예산(Body Budget)은 단순히 마이너스 통장이 되는 수준을 넘어 파산 선고를 받습니다. 흔히 마음의 문제라고 치부하기 쉽지만, 사실 이것은 철저히 뇌과학의 영역입니다.


뇌과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성이나 감정, 상상, 창의성이나 공감이 아닌, ‘예측(Prediction)’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뇌는 신체 자원을 언제, 어디에 쓸지 끊임없이 계산하는데, 이를 알로스타시스(Allostasis, 신체 항상성 유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자녀의 투병이나 가정의 위기 같은 만성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면, 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자원을 오직 생존에만 퍼붓습니다. 이때 발생하는 것이 알로스타틱 부하(Allostatic Load)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기억과 감정 조절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는 위축되고, 공포를 담당하는 편도체는 비대해집니다. 본인 한 사람의 예산도 감당하기 벅찬데, 가족 전체의 예산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뇌는 마치 과부하가 걸린 서버처럼 비명을 지릅니다. 뇌는 더 이상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고 오직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고통에만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건이 지난 후에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무너져 내리는 과학적인 이유입니다. 회복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고장 난 뇌의 예산 관리 시스템을 다시 복구하는 지루하고도 정교한 과정이어야 합니다.


논리적 구조화와 실행의 괴리: 컨설턴트의 슬픔

전략 컨설팅 프로젝트의 요체는 명료합니다. ‘문제를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구조화(MECE)하며, 풀어낼 수 있는 이슈로 세분화한 뒤 해결책을 도출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수많은 이슈트리(Issue Tree)를 그리고 수십 가지의 실행 과제(To-Do List)를 뽑아냅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프로젝트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연서의 사고 이후, 나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컨설턴트의 문법을 가져왔습니다. ‘체력을 기를 것’, ‘심리 상담을 받을 것’, ‘가계 경제를 재편할 것’ 같은 과제들이 화이트보드에 가득 찼습니다. 논리적으로는 그럴싸했습니다. 이 과제들만 수행하면 우리 가족은 다시 행복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침에 눈을 뜨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습니다. 체계적으로 도출된 수십 개의 과제는 오히려 스스로를 짓누르는 거대한 바위가 되었습니다. 프로젝트의 성공은 보고서의 논리성이 아니라 ‘실행’에 달려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내 삶의 실행력은 제로에 수렴했습니다. 변화를 이끌어내는 에너지는 논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난 신체 예산의 아주 작은 잔고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론의 바다에서 길을 잃다

회복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자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지침이 있었습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하는 법,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높이는 훈련, 신체 예산을 채우는 수면법까지.

PTSD는 과거의 사건이 현재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노출 치료나 인지 처리를 강조합니다.

회복탄력성은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마음의 근력을 키우라고 말합니다.

신체 예산은 뇌의 대사 효율을 높이는 생물학적 접근을 권합니다.


감사 일기를 써라, 명상을 해라, 하루 7시간 이상 자라, 탄수화물을 줄여라... 쏟아지는 이론들은 저마다 정답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손상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정답’은 ‘오답’보다 가혹합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어 편도체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치료를 받으려다 치료법에 체하고 마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공포 지대에서 학습 지대로 가는 ‘완충 지대’

우리는 상처를 입은 채로도 출근을 하고, 아이를 돌보고, 밥을 먹습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스트레스로 인해 편도체가 지배하는 공포 지대(Fear Zone)에 머물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이성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제 기능을 못 합니다.


많은 자기계발서가 공포 지대에서 즉시 무언가를 배우고 성장하는 ‘학습 지대 (Learning Zone)’로 넘어가라고 독촉합니다. 하지만 뇌는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You cannot learn when your brain is in survival mode. Stress hijacks the prefrontal cortex, the very part of the brain you need to make changes.” (“뇌가 생존 모드일 때는 학습할 수 없다. 스트레스는 변화를 위해 꼭 필요한 뇌 부위인 전전두엽을 하이재킹한다.)


공포 지대와 학습 지대 사이에는 반드시 안전 지대(Safety Zone)혹은 회복 지대라는 중간 단계가 필요합니다. 이 단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감각을 뇌에 전달하는 시간입니다. 전전두엽이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편도체를 달래는 과정(Smooth Transition)이 선행되지 않은 모든 과제는 독이 됩니다.


아디티 베루카 박사가 건네는 위로: 『회복탄력성의 뇌과학』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스트레스 전문가인 아디티 베루카(Aditi Nerurkar) 박사는 그녀의 저서 『The 5 Resets(회복탄력성의 뇌과학)』에서 과도한 과제에 압도당한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책 속에는 만성 스트레스로 인해 삶이 해체된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회복을 위해 요가, 비건 식단, 새벽 기상 등 10가지가 넘는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너져 박사를 찾아옵니다.


베루카 박사: “당신의 To-Do 리스트가 당신을 죽이고 있군요. 뇌는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변화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환자: “하지만 이 모든 게 저에게 필요한 것들이에요. 이걸 안 하면 저는 영영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아요.”

베루카 박사: “회복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의 뇌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단 한 가지(One Thing)만 남기세요.”


베루카 박사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의 2가지 원칙’으로 정리합니다.

단 하나에 집중하라 (Monotasking your resilience): 뇌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 번에 한 가지 변화만 시도하십시오.

작은 승리를 설계하라 (Small Wins): 아주 쉽고 사소해서 실패하기 어려운 과제를 선택하십시오. 뇌는 ‘성공의 기억’을 먹고 예산을 회복합니다.


One Thing과 밝은 점: 가장 먼저 켜야 할 등불

이 대목에서 나는 게리 켈러의 『The One Thing(원씽) 』을 떠올렸습니다.

“What’s the one thing you can do such that by doing it everything else will be easier or unnecessary?”(다른 모든 것들을 더 쉽거나 불필요하게 만들, 당신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일은 무엇인가?)


가정의 회복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수만 가지 일 중, 도미노의 첫 번째 칩처럼 다른 모든 일을 수월하게 만들 그‘하나'는’무엇일까요? 그것을 찾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나에게 ‘밝은 점’이란 거창한 치료가 아니었습니다. 주말 아침,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 가는 그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우리 가족의 신체 예산이 채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이 과제를 Early Win(조기 승리)과제로 삼았습니다. 난이도는 낮고 변화는 체감할 수 있는 것. 누가 지적할 것도 아니니,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과제를 골랐습니다.


아내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번 달은 다른 거 다 제쳐두고, 토요일 도서관 나들이만은 꼭 지키고 싶어. 당신이 내 이 ‘원씽’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배우자의 지지와 응원은 바닥난 내 에너지를 채워주는 가장 강력한 보조 배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원씽’을 향하여

이제부터 이어질 이야기는 상처를 수용하고 다시 나아가는 과정에서 제가 실제로 실천하고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입니다. 3부에서는 가정 전체의 신체 예산 회복을 위한 ‘관계’를 다룹니다. 아이와의 대화, 배우자와의 대화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예산을 채워줄 수 있는지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4부에서는 개인의 회복을 위한 ‘나를 살피는 법’을 다룹니다. 체력 관리, 휴식, 독서, 그리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글을 읽다 보면 실천해보고 싶은 매력적인 내용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회복 탄력성의 2가지 원칙’을 잊지 마세요. 한 번에 1~2개씩, 그리고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익숙해지고 나면 다음의 1~2개를 시도하면 됩니다.

인지하고 고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신체 예산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뇌가 “이제 좀 살 것 같다.”라고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하지만 단단하게 나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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