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지키는『모순』속 푸른 종이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by 명희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

두 끊어져 나는 오래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

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

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

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

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

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

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

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어제 우리의 대화를 떠올렸어.

정확히는『모순』속 이모의 선택에 대해 생각했어. 너는 이모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 다정하고 부유한 남편이 있고 삶을 즐기려면 즐길 수 있는데, 소설 속 이모는 죽음을 택해. 나는 너무 오래전이라 소설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서 책을 정리해 놓은 블로그나 자료를 살폈어.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내내 고민한 것 같아. 이모의 선택과 안진진의 선택에 대해.


그건 이모에게 기억할 ‘푸른 종이’가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우리에겐 선택에 앞서 ‘푸른 종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하는.’ 그런 ‘푸른 종이’가 있어야 삶의 지루함도, 고난도 견딜 수 있어.


작년에 네가 『모순』을 아냐고 물었을 때, 나는 네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에 놀랐어. 오래된 책이기도 했고 네 나이에 양귀자 작가를 안다는 것도 신기했거든. 나는 사실 내가 『모순』을 읽었는지, 아닌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양귀자 작가를 안 읽은 지 정말 오래됐거든. 그러니까 내가 소설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기도 전에 양귀자 작가의 책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었고 또 내겐 양귀자 작가를 지울 수 없는 나만의 슬픈 사연이 있거든.


내가 양귀자 작가를 처음 안 건, 교회 오빠 때문이었어. 그 오빠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책을 정말 인상 깊게 읽었다고 그의 친구에게 말하는 걸 들었거든.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어. 바로 책을 빌려서 읽었어. 한 여자가 인기 남자 배우를 납치하는 내용은 당시에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어. 하지만 책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어. 단지 내가 좋아하던 오빠에게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걸, 내가 그처럼 성숙하고 지적인 여자라는 걸, 알리고 싶었을 뿐이야. 겨우 열다섯의 내가 뭘 알았겠니.


뭐 노력에도 내 짝사랑은 고백도 못 해 보고 끝났어. 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읽었다고 자랑할 기회도 오지 않았지.

그리고 언젠가 버스에서 교회 언니와 함께 손을 잡은 그 오빠와 마주쳤어. 그게 내가 기억하는 양귀자 작가야. 양귀자 작가를 생각하면 그 오빠가 떠오르고 그를 떠올리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 떠올라. 그리고 언젠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배우가 떠올라.





네 또래 아이들에게 이 책이 『오만과 편견』같은 고전으로 읽힌다는 느낌을 받았어. 그러니까 『모순』은 이제 한국의 『오만과 편견』같은 책이 된 것 같아. 하지만, 이 두 책에는 다른 점이 있어.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는 어쨌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단지 그가 돈과 명예도 가진 남자라는 게 다른 점이지. 그러니 안진진과 엘리자베스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 배우자를 찾는 태도가 달랐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


이모는 어떤 남자를 선택할 거야? 그게 네가 내게 던진 질문이었어.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나영규와 낭만적이지만 가난한 사진작가 김장우 중에.


그리고 나는 『모순』을 읽든 읽지 않았든 너희 또래 아이들이 이 질문을 즐긴다는 것도 알았어. 성향이 다른 두 이성을 저울 위에 올리고 재는 건, 아주 오랫동안 있어 온 흥미로운 일이기도 하니까.


너는 별 고민 없이 나영규를 고를 거라고 했어. 그리고 안진진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고 했지. 그건 그냥 호감이 있는 상대를 두고 하는 저울질이었고 그렇다면 조건이 더 좋은 나영규가 나을 거라고. 그리고 너는 이모의 선택을 보고도 나영규를 선택한 안진진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 어쩌면 먼 미래에 안진진은 김장우를 선택하지 않은 걸 후회할지도 모르지.





네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네게 두 권의 시집을 선물했어.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과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이었어. 나는 대학생이라면 적어도 기형도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잘난척했지. 그리고 네게 기형도의 시를 한 번이라도 읽은 사람과 연애를 하라고 했어. 자신감 있게 그렇게 말해 놓고 뭔가 찝찝했어. 내내 혼자 속으로 내가 한 말을 되뇌었어. 과연 그 남자는 괜찮은 사람일까. 그러니까 기형도를 읽는 남자 말이야. 그 시를 이해하고 그 속의 서정을 아는 남자 말이야. 그 관계가 안전하고 편안할까. 만약 나라면, 나라면 어떨까....


스물다섯의 나라면 나는 김장우를 선택할 거야.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그때의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와 연애를 할 거야. 그러니 애초에 안진진이라는 캐릭터는 생기지도 않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영규 같은 사람을 선택할 거야. 안정적인 삶이 주는 자유를 알기 때문이야. 더는 밤 기차를 타고 여행하거나 기차역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노숙하는 여행이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시간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더는 적은 돈으로 여행을 하면서도 즐겁던 그 나이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아. 또한 당시에는 선택이라 믿던 그런 유의 여행이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걸 알 정도로 나는 나이를 먹었어. 이제 내게 여행은 익숙한 곳을 다시 방문하고 좋아하던 장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 됐어.


언젠가 나와 비슷한 나이의 어떤 이가 여전히 기차표 한 장을 들고 유럽을 여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각 시티에 사는 오랜 지인에게 전화해, 연결되면 며칠 신세를 지다가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 그때 기분에 따라 행선지를 정한다고. 지인이나 친구와 연락이 안 되면 길에서 노숙을 한다고 그는 말했어. 그는 여전히 스물의 어딘가에 선 것 같았고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어른이 된 것 같았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철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 그가 자라지 못해서 그의 가족이 피해를 보는 것 같았지.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머리가 희끗한 피터팬을 보는 불편함을 느꼈어. 현실을 부정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의 모험심에 매달리는 것 처럼 보였거든.


누구든 결국 자라서 어른이 돼. 결국엔 밤 기차를 피하게 되고, 역에서 노숙을 하지 않게 되고,

열정적인 사랑보다 생활을 먼저 생각하게 돼. 돌봐야 할 가족이 생기고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울타리였던 부모는 내게 의지하지. 그렇다고 낭만이 없거나 열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건 네가 어떤 이십 대를 보냈느냐에 달려있어.


좋아하는 것을 끊임없이 찾고 그것들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스치는 사랑도, 깊은 사랑도 여름철 납작 복숭아처럼 좋아해.

한 시절에 피는 꽃을 놓치지 말고 많이 바라봐주고 예쁘다고 말해줘.

너에게 예쁘다고 다정한 말을 하는 사람과 자주 기뻐해.

네가 좋아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염시켜.

'힘센 기억'들을 차곡차곡 쌓아두면

그것들이 너의 '푸른 종이'가 될거야.


그래서 언젠가 네가 어른이 되면 너에게는 ‘먼지 투성’이가 되어도 색이 바래지 않는 자기만의 ‘푸른 종이’가 있는 거야. 그게 모든 것을 내건 사랑이어도 좋고 열정을 다 한 어떤 일이어도 상관없지만, 난 네가 마음이 아린 사랑을 한 번 쯤은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가 시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더 바랄 게 없고.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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