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속 캐릭터 ‘짐’을 중심에 세워, 그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던 제임스는 가족과의 생이별 위기 속에서 도망을 결심하고, 우연히 가출한 소년 허클베리와 함께 미시시피 강을 따라 여정을 시작한다.
강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제임스는 백인 사회의 위선과 잔혹함, 그리고 노예 제도가 만들어낸 왜곡된 질서를 목격한다. 그는 생존을 위해 상황에 맞는 말투와 태도를 선택하며 자신을 보호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예리하고 복합적인 사고를 이어간다.
소위 주인이라고 불리는 백인들은 자신의 잔혹함과 탐욕을 인정하지 못하고, 도미니크회 수사의 거짓된 말에 기대어 종교적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나를 정의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과 내 마음이 공포와 분노에 사로잡히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물론 분노할 것이다.
“백인들은 우리가 특유의 말투로 말할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언어를 배워두는 게 도움이 된단다.” 내가 말했다. “그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면 우리만 고통받으니까. 아무래도 ‘그들이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면’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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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된 책 리뷰는 이소 (yisodreams@gmail.com)의 개인적인 해석 및 감상입니다.
퍼시벌 에버렛의 <제임스>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와 <동물농장>이었다. <1984>에서 당은 ‘뉴스피크’라는 언어를 통해 사람들의 사고 자체를 제한한다. 언어를 줄이며 다양한 생각과 의견도 사라진다. <동물농장>에서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동물들이 결국 지배당한다. 배움의 차이가 곧 권력이 된다. 이 소설에서도 흑인 노예들은 ‘노예의 말’을 쓰고,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위치에 있다. 이는 단지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와 사고의 자유를 함께 빼앗는 구조다. 몸을 예속시키는 것에 더해 표현과 사유의 자유까지 제한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더 근본적인 지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짐은 그 틀 안에 완전히 갇혀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노예의 말’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노예임을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이들이 실수로 ‘백인의 말’을 사용해 의심을 사지 않도록, 괜히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심스러운 계산이었다. 백인들은 흑인 노예를 지능이 낮은 존재로 여겨야 안심했고,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하루라도 덜 혹독하게 살 수 있었다. 짐이 가르친 것은 굴복의 언어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었다. 겉으로는 낮추되, 속으로는 무너지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허클베리와의 대화 속에서 짐은 “사람들은 믿고 싶은 거짓말은 믿고, 무서운 진실은 무시하고 싶어 한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여기서 말하는 ‘무서운 진실’은 ‘흑인도 인간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노예제는 정당화될 수 없다. 마가렛 가너 사건에서 드러난 논쟁이 바로 이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이를 죽인 그녀를 살인자로 처벌할 것인가, 아니면 주인의 소유물로 인정해 처벌하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죄를 물기 위해선 흑인인 그녀를 인간으로 인정해야 하고, 재산으로 인정하면 죄를 물을 수 없다. 그 모순이 드러났다는 것이 바로, 흑인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부정한 증거가 아닐까.
커다란 배의 보일러실에서 일하던 노예가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신의 주인의 얼굴을 언제 보았는지, 언제 마지막 대화를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식사 때마다 문 앞에 누군가 놓아둔 빵을 받아먹으며 (그것이 주인이 놓아둔 것이라 믿고) 신호에 맞춰 석탄을 퍼 넣는 삶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주인을 존경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언어가 제한되고, 고립과 노동이 반복되고, 시간의 감각이 사라진다면 정상적인 사고를 유지하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삶 외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없게 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너는 누구냐”
“저는 제임스예요.”
“제임스 뭐?”
“그냥 제임스요.”
마을 보안관과 제임스의 이 짧은 대화에 눈물이 난 이유는, ‘나는 그냥 제임스예요’라는 말이, 그저 짐이라는 도망자의 이름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는 의미보다 더 깊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더 이상 ‘노예의 말’이 아니었다. 그의 그 짧은 한마디는 누군가에게 속한 노예로서의 삶을 정확하게 거부하는 말이었다. 나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이, 그냥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인간이라고. 그 외에 다른 설명이 아무것도 필요 없는. 나는 나라는 한 인격체로서 충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증언하는 느낌이었다.
지금은 손발이 묶이지 않고 공개적인 고문도 없지만, 과연 모두가 한 인간으로 충분히 존중받고 있을까.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정서적, 육체적 고통 속에 놓인 이들이 있다. 말하고 싶어도 들어주는 이가 없어 침묵하는 사람들, 억압으로 인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름과 목소리를 되찾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저는 ○○입니다”라고 말할 때, 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그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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