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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내는 편지(19)

자동차 마니아 미국 한 달 살기

by 자칼 황욱익

날씨 요정의 실종.

원래 나는 어디를 가도 금방 적응하고 날씨도 기가 막히게 따라 주는 편이다.

장마철에 놀러 가도 내가 잡은 날짜에는 거의 화창한 날씨가 계속된다.

그러나 이번은 좀 많이 달랐다.

비를 몰고 다니는 건지 시애틀에서는 연일 내내 우중충하게 보냈고 비가 더럽게 안 온다는 투산에서도 내가 도착한 후로 비가 조금 내렸다.

멤피스에서는 사상 최악의 폭염을 기록할 때 있었고 내가 떠난 이후 시애틀에서는 화창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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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피마 항공우주박물관을 다녀왔는데 전시 규모나 큐레이팅, 설명판 등등이 매우 훌륭했다.

일단 규모에서 먹어주는 부분이 큰데 외부에 전시된 비행기들은 날씨와 보관의 이유로 캐노피가 대부분 교체되어 있었고 모래 바람 때문에 엔진 흡입 배출구는 전부 막아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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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를 비롯해 B-17, B-29,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탄다는 B-52 등등 걸출한 폭격기와 전투기를 실제로 보면 그 위용에 압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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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끝낸 공신인 B-29는 예전에 여의도 안보전시관에도 있었는데 그 비행기가 사천 어딘가로 옮겨져 방치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씁쓸하기도 했다.

이곳에 전시된 B-29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떨군 에놀라게이나 복스카는 아니었지만 같은 기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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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 중에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에 참전한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났다.

휠체어를 타고 온몸에 알 수 없는 호스와 산소통까지 달고 계신 이 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참전 모자를 쓰고 계셨다.

귀도 안 들리고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지만 함께 온 가족들에게 한국전 참전에 대해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저런 분들 덕에 나 같은 한량이 자유롭게 일을 빙자한 여행을 다니고 밥 굶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이다.

고마움에 대해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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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마 항공우주박물관은 규모가 엄청나다.

6개의 격납고를 개조한 전시 공간과 야외 전시장까지 합치면 며칠 전 다녀온 미드웨이 박물관에 한 5배나 6배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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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주둔하며 독일 폭격을 담당했던(영화 멤피스 벨의 배경) 390 폭격대대 공간이다.

실제 폭격기를 비롯해 작은 소품, 작전 일지, 실종자, 사망자 등에 대한 기록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근무하는 발룬티어들의 수준도 상상이다.

나이 지긋한 퇴역 할아버지는(이 할아버지 390 폭격대대에서 근무하시면서 독일 폭격에 참전하신 분이다) 독일군의 위험보다 작전에 나갈 때 두려움과 비행 중의 추위가 더 고통스럽다는 얘기를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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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미국을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점은 사람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에 대한 표시가 인색하지 않다는 점이다.

초상화와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통해 이들은 관련된 사람 한 명 한 명에 대한 기록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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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도 때마침 개봉한 탑건 매버릭을 통한 마케팅이 진행 중이다.

힘 있는 콘텐츠 하나가 여러 곳의 먹거리가 되는 걸 보니 '근본 없는 미국'이라는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유럽에 비해 역사가 짧다는 건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 될 수 있지만 건국 이후의 근현대사 정리는 미국만큼 잘 된 것을 찾기 힘들다.

그런 방식 하나하나가 쌓여 이제는 200년을 넘어가니 방대해지고 깊이도 점점 깊어지고 있다.

우리가 맨날 5,000년 역사 들먹이기 좋아하지만 미국만큼 제대로 정리된 사료가 있기나 한지 궁금하다.


원래는 피마 항공우주박물관 관람 후 근처에 있는 본 야드 사파리까지 가려고 했는데 본 야드 사파리는 현재 일반 관람객을 받지 않는다.

약 4,100대의 항공기가 잠들어 있는 본 야드 사파리는 철조망 따라 밖에서만 보는 걸로 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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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에는 피나클 피크에 갔었다.

작은 민속촌 같은 곳인데 오랜만 밥다운 밥을 먹었다.

풀 사이즈 베이비 폭립과 카우보이 스테이크(무려 T본이다)는 정말 맛있었고 이쁘게 꾸며진 동네도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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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묵고 있는 호텔은 지금까지 미국에서 묵었던 호텔 중에 최고다.

치안도 좋고 밤에 근처를 걸어 다녀도 안전하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수영장도 딸려 있으며 무려(?) 하우스키핑까지 되는 곳이다.

코로나 이후로 미국의 호텔은 하우스키핑을 하지 않는 곳이 많고, 아랫동네 오기 전에 지냈던 워싱턴 주 같은 경우 한 곳의 숙박업소에서 2주 이상 지내는 것이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연히 서비스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고 3D 업종에 근무하던 해외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인력난 역시 더욱 가중된 상태다.


고작 이틀 머물렀지만 투싼이라는 동네는 다시 한번 여유롭게 찾고 싶은 곳이다.

이번 일정 중에 멤피스와 투싼, 샌디에이고는 말 그대로 느긋한 휴가를 보내는 느낌이다.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진 도시라 그런지 몰라도 낮에는 정말 덥고 건조하지만 해가 질 무렵에는 아름다운 석양이 지는 곳이다.

아마 투싼에 대해 좀 더 알았다면 더 재미있게 보냈을 것이다.


맘모스 프로젝트 자동차 매냐 미국 한 달 살기의 남은 일정은 이제 5일 남짓이다.

내일 아침 일찍 시애틀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다.

시애틀에서는 랠리 스쿨을 비롯해 또 다른 익사이팅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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