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을 자주 하는 나에게 언제부턴가 습관이 하나 생겼다. 집에서 이를 닦고 나왔음에도 차에 타면 자연스럽게 무설탕 민트를 하나 입에 넣는 것이었다.
길이 막혀서 지루하면 또 한 알,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졸음이 신호를 보내면 또 한 알, 온라인으로 강의를 듣다가 또 한 알.
이렇게 몸 속으로 매일 대여섯 개의 무설탕 민트를 녹여서 흘려보냈다.
나의 할머니는 식사를 하신 뒤에는 항상 칠성 사이다를 한 잔 드셨다. 지금도 내 귓가에 할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진재야, 가서 사이다 한 병 가져와라.
이런 것도 대물림이 되는 건가. 나도 밥을 먹고 나면 탄산이 들어간 무언가를 마셔야 소화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탄산수는 밍밍했고 본격적인 탄산음료는 액상과당이 두려웠다.
하지만 요즘은 제로 전성시대가 아닌가. 당 걱정 없이 탄산음료를 즐길 수 있다. 점심 먹고 한 잔, 저녁 먹고 한 잔, 뉴스 보면서 또 한 잔.
무설탕의 숨겨진 진실은 설탕 대체제가 가진 부작용에 있다.
한 알 정도는 무해할거라 생각하며 입에 던져 넣은 무설탕 민트.
식후 소화제라고 착각하고 마셨던 제로 음료.
매일의 반복한 작은 선택들에 나 스스로 속고 있었다.
이것은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다를 바가 없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속에서 불행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알약이었던 소마는 사실 가짜 안심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과 감각을 마비시키는 가짜 유토피아의 도구였던 소마가 지금의 무설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의 무설탕 제품 역시 살이 찌거나 혈당을 높일 걱정이 없음을 강조하며 우리를 안심시킨다.
소마를 통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는 불행을 겪지 않는 대신 깊은 감정과 자율성, 진실한 인간관계를 잃었다.
설탕 대체제는 입에서는 달콤함을 주어 만족을 느끼지만 장내 마이크로바이옴이 깨지며 소화기관에는 혼란을 준다. 단 맛이 들어왔는데 칼로리가 없기 때문에 뇌 역시 혼란을 겪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설탕대체제로 자신을 속이며 몸 속의 생태를 교란시키고 있는 것이다.
달지만 달콤하지 않은 결과로 돌아온 것들.
반복해서 먹었던 작은 민트 한 알이 지금의 내 장에 나비효과가 되어 큰 날개를 펄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