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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기준, 하나의 몸

모든 딸들에 대한 몸 이중 구속에 대해

by 진재


“엉덩이가 너무 납작하면 볼품없어.”


“근데 너 엉덩이 너무 튀어나온 거 아니야? 좀 덮어라."


이 두 문장은 한 사람의 입, 엄마의 입에서 지난 40년 동안 나온 말이다.

나는 지금도 옷을 입을 때 전체적인 밸런스를 보기 이전에 내 엉덩이가 유난스러워 보이는지를 체크한다.


엄마는 모름지기 여자라면 엉덩이가 둥글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곡선이 ‘도드라져 보이는’ 순간을 불편해했다. 이처럼 상반된 기준을 동시에 요구받는 경험, 특히 그것이 반복되고 회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할 때, 심리학에서는 이를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고 부른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으라고 하면서 동시에 빨리 먹으라고 한다.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낮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화를 낸다.

너만의 인생을 개척하라고 하면서 튀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중구속은 언어적 비언어적 상황을 포함하여 위와 같이 우리 일상에 깊이 침투해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이중구속 메시지를 들으면 혼란스러워지고 불안해지며 무엇을 해도 자신은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딸이 엄마로부터 받는 몸에 대한 이중구속은 단순한 몸매에 대한 간섭이 아니다. 그것은 자아의 형성과 수치심, 자기 검열, 그리고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깊이 스며 있는 구조적 문제다.


딸은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지만, 그 사랑은 항상 조건이 달려 있다. '예쁘되 과하지 않아야 하고, 건강해 보이되 통통해서는 안 되며, 섹시해 보이되 절제되어야 한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맞춰 자기 몸을 조정하려 했지만, 어느 쪽으로든 “틀렸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살이 찌면 “보기 싫다”고 하고, 살이 빠지면 “볼품없고 여성스럽지 않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받은 나는 결국 내 몸의 어떤 모습도 긍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도 함께 쇼핑을 가면 엄마는 시착을 한 나의 엉덩이부터 확인을 하신다.


"엉덩이가 좀....?"


엄마의 이런 평가는 엄마 자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억압'의 메시지를 답습한 것이다. 엄마가 산후 우울증으로 체중이 증가했을 때 아빠는 모욕의 9부 능선을 넘는 말을 서슴지 않고 엄마에게 던졌다.


이런 수치를 겪고 난 엄마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딸인 내가 당할까 봐 불안하다. 정신분석 상담 전문가 박우란은 엄마들은 딸을 자신의 연장선상으로 본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엄마는 너무 말라도, 너무 살이 쩌도 안 되는 적정한 기준을 딸인 나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어떤 몸으로도 엄마를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엄마의 이중구속에서 벗어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늘 나의 몸에 대해 근원적인 죄책감을 갖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내 몸의 적정한 기준은 내가 정하기로 했다. 상체와 하체의 극복할 수 없는 불균형에 대해 나는 이런 몸의 사람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어떤 모양의 엉덩이든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가장 편한 몸의 사이즈는 내가 정한다. 이것은 나의 몸이기 때문이다.


몸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것은 곧 자기 해방을 의미한다. 나는 이렇게 점점 더 몸에서 해방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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