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태 1,18)

by 어엿봄

대림초 네 개에 모두 불이 켜졌다. 이내 곧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오늘은 다시 마태오복음 1장의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는 장면을 들었다. 내 마음에 다음의 성경구절이 남았다.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태 1,18)

그 모든 게 성령의 일이었다. 우리가 미리 계획하고 또 실행에 옮긴다고 하여도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그리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성령의 일이었다. 하느님의 영, 우리의 위로자이시며 보호자시고 또 협조자가 되시는 선한 영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나는 주님 앞에 그저 나를 놓아두었다. 그분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느끼고 싶었다. 그분 안에서 나는 누구인지 진정한 내 얼굴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하여 나를 통하여 이루실 당신 일에 기쁘게 협조하고 싶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그분의 뜻에 조용히 나를 봉헌하고 싶었다.


오전에 라테란 대성전 세례당을 찾았다. 세례당 안쪽에 있는 작은 경당엔 보통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차분히 앉아 기도하기 좋은데 주일 미사는 처음 참석 해봤다. 처음에는 한둘만 있던 경당에 조금씩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떠드는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알고 보니 미사 전 성가 연습을 하러 온 성가대원들이었다. 그래, 나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지... 다시 현주소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너무 시끄러웠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다였는데 기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시끄러운 건 경당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기도에 들어갔다면 그 계획을 변경하지 말라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규칙이 떠올랐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며 뺨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경당 위쪽의 창문을 통해 강한 햇살이 하필 나를 비추고 있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나의 안을 밝히고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나를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분께서 따뜻하게 하시는 나의 마음은 다시 세상에로 향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게 우리네 운명. 시끄럽다 하여 마음대로 귀를 닫을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적극적으로 귀를 열고, 아니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성령은 그렇게 당신의 방식으로 나를 열어 일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그분께서 내 의지를 존중하셔서 먼저 나를 들으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나에게 물으신다.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행복하겠느냐고 말이다.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행복이 있었다. 나는 그 행복을 슬픔으로 덮어버리고 아쉬워하며 속상해했다. 슬픈 얼굴을 한 채 나는 주님의 뜻을 찾겠다고 나섰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그 슬픔을 치워버리기까지 행복에 가닿지 못하셨을 것이다.

늘 아쉽고 미련이 남는 기억들이 있다. 그래서 슬펐다. 슬픔은 내가 맛보았던 기쁨과 행복의 반증이었다. 8년의 시간 동안 공부를 했었다. 그리고 나는 이곳으로 떠나왔다. 나름 긴 시간 동안 나의 젊음과 열정을 쏟아냈던 대학의 캠퍼스가 가끔 생각나곤 한다. 사랑한 만큼 상처도 받았기에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나의 고민을 나누기에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그 차이는 언제나 나를 외롭게 했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다시 물으셨을 때, 나는 그때 즐겁고 행복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함께 싸우면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게 비록 공동체에 돌아와서 편안히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나 그 시간이 내겐 참으로 소중했다. 그래서 슬펐던 것 같다. 그만큼 좋아했으니까 그 공부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게 늘 아쉽고 속상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나의 슬픔에 손이 갔다. 슬픔이 남아서, 늘 다시 돌아가고 싶고 꿈꾸고 싶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성령께서는 이렇듯 내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나에게서 일하신다. 슬픔을 걷어내면 거기엔 기쁨이 있다. 슬픔의 길을 지나 나는 기쁨의 길로 들어간다. 사람들과 함께 떠들고 싸웠던 그 시절에 나는 좋았다. 비록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그냥 겁이 나서 다 가려버리고는 혼자 슬퍼했던 그 시절을 다시 만난다. 따뜻한 햇살이 나를 비추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얼굴을 본다. 맑았던 그리고 또 밝았던 나를 느낀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다시 성령께 내어 맡긴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순간이 - 슬픔이든 기쁨이든 - 다시 빛을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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