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 (요한 11,50)
배가 고프다. 약간 어지러운 것도 같다. 오전 내내 방 청소를 했다. 오늘부터 2주간의 방학, 잠시 공동체를 옮겨야 하기에 열심히 정리를 했다. 그간 모아둔 문서들을 파쇄기에 돌리며 시끄러운 소음에 불쾌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작업이었다. 어여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내다 버리며 흐트러진 방의 질서를 찾는 작업은 왠지 내면의 질서도 함께 찾아주는 것 같다. 사실 많이 피곤한 아침인데, 어젯밤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방 공기가 건조할 때면 피부가 가려워지기도 하고 또 기침을 하기도 해서 숙면에 방해를 받곤 한다. 그냥 모른 척하고 다시 잠을 청해야 했거늘, 생각의 바구니를 쏟아버렸다. 어제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고 미처 듣지 못했던 예수님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그분의 목소리와 얼굴과 달리 내 정신만큼은 뚜렷해졌다. 이제 곧 성주간이다. 나는 나를 다 쏟아 그분만을 사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온전한 내 사랑의 대상이 멀어진다. 사순의 여정 동안 그분께서는 내가 쏟아내는 사랑보다 훨씬 큰 사랑으로 나를 대하고 계셨다. 그분은 마치 나를 위해 이 모든 것을 마련하여, 종국에는 나를 되찾아주시려는 것 같다. 당신은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지고 나를 남기시려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렇게 한참을 뜬 눈으로 누워있다 다시 잠이 들었다가 하루를 열었다. 그러고는 아무 감흥 없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을 정리할 때면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언젠가 찾아 올 나의 죽음에 질서가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흐트러지고 희미해진 순간에 죽음이 나를 찾아올까. 정돈된 방에 고요히 앉았다. 쏟아낼 힘이 더 없는 마치 끝과 같은 순간 그냥 존재하는 나로서의 질서를 찾는다. 화낼 것도 두려워할 것도, 너무 기뻐할 것도 신날 것도 없다. 옅어져 가는 주님 얼굴 떠올리다 그조차 잡을 수 없어 손을 내려놓는다. 차분히 기다려야 할 때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요한 11, 49-53)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다수를 위한 한 사람의 희생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 한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이 대사제의 예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한 사람이 바로 온 백성의 구원자 예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모든 희생물의 맏이가 되실 작정이셨다. 모두를 위해 자신을 다 바칠 준비가 거의 다 되었다. 그분은 그렇게 자신의 질서 있는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 하나의 죽음에 온 우주가 집중할 것이다. 온 우주가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다. 완전히 사라지는 죽음으로써 그분은 나를 살리실 것이다.
군중은 소리 지를 것이고 그들을 선동하는 백성의 지도자들은 끝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보고 만족해할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자신들이 살았다고 민족을 구원했다고 축제를 벌일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돈된 죽음의 끝에 모든 것이 바른 자리를 찾으니 다시 살아난 주님이 새 생명으로 온 우주를 감쌀 것이다. 이 엄청난 신비를 목격하기 위해 나는 자세를 가다듬고 고요한 침묵에 잠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