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기억을 깨울 때

노래로 시작하는 이야기 #20

by 시절청춘

나는 노래를 듣고, 음악을 들을 때 음질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음악에 조예가 깊다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단지 음질에 따라 음악이 듣고 싶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젊은 시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 거의 매일같이 듣곤 했는데
그때도 음향이 주는 울림에 따라 감동의 깊이는 확연히 달라졌었다.
같은 음반이라도 소리가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음악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다가왔다.


젊은 시절, 한 교수님의 자택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분의 거실에는 진공관 오디오와 큼직한 스피커가 놓여 있었고,
교수님은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음악을 틀어 주셨다.
어떤 곡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오케스트라 공연장 한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내가 쓰던 오디오나 이어폰에서는 느껴본 적 없는 울림이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처음으로 ‘충격’이라는 감정을 음악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나는 자연스럽게 음질에 집착하게 되었다.


물론 큰돈을 들여 오디오를 장만할 형편은 아니었다.
대신 영화를 볼 때라도 입체적인 소리를 느끼고 싶어
혼자서 오디오를 연결하고, 스피커를 사방에 설치했다.
지금으로 치면 6 채널 서라운드 사운드를
완전히 수동으로 구현해 보려 애썼던 셈이다.




20대 초반, 운전면허가 없던 나는 후배의 차를 자주 얻어 타고 다녔다.
그 후배의 차는 우리나라 최초의 스포츠카라 불리던 ‘스쿠프’였다.
여기저기 튜닝을 해 놓은 차량이었고,
굉음과 함께 시내를 휘젓고 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느 날, 도로가 막혀 차가 멈춰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와이퍼가 천천히 움직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순간, 후배가 말했다.


“선배, 이렇게 비 오는 날엔 이 노래가 최고예요.”


그리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튜닝된 차량의 고급 스피커를 통해 전해진 소리는
지금까지 내가 들어왔던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잔잔하게 시작되는 멜로디,
곧이어 스며드는 가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믿기 어려울 만큼 감미로웠다.


당시 나는 그 노래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웅장하면서도 깊이 있는 소리와 목소리는
설명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노래에 한동안 깊이 빠져 있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노래가 되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노래가 가객 김광석 님의 "사랑했지만"이라는 것을.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
...
사랑했지만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


https://youtu.be/ZZEv8ZB6G_s?si=8cf4c1LyBlytS8VI


그 이후로 나는 여러 대의 차를 바꿔 탔지만,
그날 들었던 음향의 감동을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차 안에 스피커를 여러 개 달아보고,
입체적인 소리를 만들려 애써 보기도 했지만
내가 기억 속에 담아 둔 그 소리는 쉽게 재현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날, 빗속에서 들었던 그 음질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음향이 주는 감동은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기억을 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을, 아주 깊은 곳에 각인시켜 놓는다.




어떤 노래는 가사로 남고,
어떤 노래는 멜로디로 남는다.
하지만 어떤 노래는
그때의 공기와 감정, 풍경까지 함께 기억 속에 남는다.


비 오는 날, 문득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한 곡의 노래가
오래 전의 나를 다시 불러내는 이유도
아마 그 소리가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은 소리로 시작되지만, 결국 기억으로 완성된다.


월, 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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