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이 위로가 되는 이유

'늦었다'는 핑계를 버리고 '가능성'을 입는 시간

by 시절청춘

'인생 전반전을 치열하게 살아오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늘 듣고 싶었던 말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누군가에게는 그저 가볍게 건네는 인사치레일지 몰라도, 제게는 그 한마디를 다정하게 건네준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 말해주었음에도 스스로 '이미 늦었다'라고 단정 지으며 그 위로를 밀어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마주하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종종 너무 늦어버렸다고 좌절합니다. 흘려보낸 시간, 머뭇거리다 놓쳐버린 선택의 순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들. 그 모든 아쉬움이 겹겹이 쌓여, 자꾸만 제 옷깃을 뒤로 잡아당기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늦었다'는 기준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속도를 곁눈질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누군가는 이미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고, 누군가는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환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화려한 타인의 트랙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비교하다가, 결국 '나는 늦었다'는 서글픈 결론에 도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각자의 삶이 나아가는 속도마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빠르게 제 방향을 찾아 질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도록 헤매고 멈춰 선 끝에 비로소 진짜 내 길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인생 전반전을 다 건너온 지금에야 저는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늦었다'는 말의 진짜 의미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 아니라, '아직 시작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요.

"아직 늦지 않았다"는 말이 그토록 깊은 위로가 되는 이유는, 그 문장 안에 아직 움틀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이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움직이고, 선택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따뜻한 허락이니까요.


36년의 군 생활을 돌아보면 뼈아프게 후회되는 두 번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 번은 20대 시절 장교로의 신분 전환을 망설였던 일이고, 또 한 번은 40대에 준사관으로의 도전을 포기했던 일입니다.


20대 시절, 저는 부사관이라는 직책에 대한 묘한 회의감 속에서도 생각만 거듭하다 결심의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조금만 더 일찍 서둘렀다면 결과는 달랐을 텐데, 결국 늦은 선택으로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학교에 1년만 일찍 들어갔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아쉬움도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40대에는 준사관의 꿈을 꾸었습니다.

30대 후반부터 품어온 생각이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며 또다시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먼저 준사관으로 진급하는 모습을 보며, 지레 겁을 먹고 '나는 이미 늦었다'며 스스로를 주저앉혔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누군가 제 어깨를 두드리며 "선배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책을 펴두긴 했지만, 사실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막막함과 익숙한 부사관 생활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의 전반전은 스스로 늦었다고 단정 지으며 수많은 가능성을 접어둔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링에 오를 인생 후반전만큼은, 그 가능성의 말을 온전히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 말은 이제 저를 다그치는 채찍질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기회를 주는 다정한 포옹입니다.

가능성이란 아직 오지 않은 거창한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기꺼이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는 '나 자신'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후반전을 준비하는 오늘, 저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제 걸음을 담담히 인정하면서도 결코 멈추지 않기로 다짐합니다.

어차피 이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것이며,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한 온전한 나의 선택이니까요.


새롭게 행정 업무를 배우고, 직업을 구하며, 저의 이름이 적힌 시와 에세이를 쓰는 일.
남들은 은퇴를 말할 나이에 무슨 도전이냐고 할지 몰라도, 저는 지금의 제 속도에 깊이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타인의 시계에 쫓기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이 걸음이, 제 삶의 가장 올바른 속도라 굳게 믿습니다.



늦은 것이 아니라, 아직 시작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순이 - 거위의 꿈》

https://youtu.be/suXnFAxMK78?si=a4B1qbkW5pPRZhfb

[Gemini 활용 이미지 생성]

이전 13화자유 -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나만의 지도를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