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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견디어낸 광화문 앞에 서다

경복궁의 얼굴 광화문 이야기

by Twinkle Mar 23. 2025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슈퍼주니어 규현의 ‘광화문에서’...


많이 들어본 노래 제목들이죠? 


요새는 뉴스만 봐도 ‘광화문’이라는 키워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그만큼 ‘광화문’이 단순히 ‘문(門)’의 개념을 넘어 우리 사회에서 정치, 문화, 사회 등 다방면에서 상징적이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흔히 자기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잘 버텨낸 사람에게 ‘우직하다’라는 표현을 하고는 합니다.

저는 광화문을 보면 그런 느낌이 듭니다. 광화문은 정말 많은 수난을 겪었죠. 우리 역사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혼란했던 역사 속에서도 ‘우직하게’ 그 어려움을 견디어 내고 조선의 심장인 서울의 가장 한복판에 지금까지 굳건히 서 있습니다.   

야경도 멋진 광화문야경도 멋진 광화문

 

광화문은 경복궁의 얼굴이자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南門)인데요.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 북쪽에는 신무문(神武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광화문은 태조 이성계 시기에 정문(正門), 오문(午門)이라고 불리다가 세종대왕 시기에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요.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 시기에 집현적 학자가 어명에 따라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광화문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들이 있는데, 제일 많이 알려진 것이 ‘광피사표 화급만방(被四表 及萬方)’이라는 글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光(군주의 덕)은 사방을 덮고, 化(교화·바른 정치)는 만방에 미친다’는 뜻이죠. ‘임금의 크나큰 덕이 마치 햇살이 모든 곳을 비추듯 백성들에게 미치게 한다’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이런 의미 있는 이름을 가진 광화문은 앞서 우리가 살펴봤던 동십자각 및 서십자각과 연결되어 성벽을 이루게 되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바로 2010년에 복원된 것인데요. 광화문은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섰습니다. 광화문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다시 세워졌는데요. 하지만 6.25 전쟁 때 폭격을 당해 석축만 남게 됐죠. 그러다 1968년 다시 광화문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됩니다. 


그럼 그 당시의 광화문은 어떻게 복원되었을까요?     


당연히 원재료인 나무를 사용했을 거라고 생각하셨을 텐데요. 의외의 재료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바로 콘크리트죠. 밑의 석축은 남아있던 기존 것을 그대로 활용했고 나무로 만들어야 할 윗부분, 처마 부분을 콘크리트로 복원하고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실제로 당시 광화문은 돌, 철근, 콘크리트로만 지어졌다고 알려집니다. 한마디로 ‘콘크리트 광화문’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왜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로 짓도록 했을까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을 재료로 복원하라’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졌는데요. 나무보다는 콘크리트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르기도 했고, 당시는 전쟁 직후라 나무도 귀하고 구하기도 매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광화문의 이름이 적힌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한글로 적히게 되죠. ‘光化門’이 아닌 ‘광화문’으로 말입니다. 원래의 모습과는 좀 많이 다르죠? 그렇게 40여 년간 한글 현판을 단 콘크리트 광화문은 유지됩니다.      


문화재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죠.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도 광화문을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계속됩니다, 콘크리트라는 재료 때문만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고종 때의 위치와 달랐기 때문이죠. 


잘 생각해 보면,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기 때문에 궁궐건축의 원리에 따른다면 당연히 경복궁의 건물과 일직선상의 축에 위치해야겠죠? 그런데 당시의 광화문은 축이 틀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총독부 때문이었죠. 조선총독부를 기준으로 광화문을 복원하다 보니 그 축이 틀어진 것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한국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남산에 세운 신사가 바로 조선신궁이죠. 조선총독부의 축이 향한 곳이 바로 조선신궁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일제는 1910년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통치를 위한 행정기구들을 설립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총독부죠.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를 가로막은 것이 바로 조선총독부였어요. 너무나 악의가 보이는 위치였죠.      


참고로 일제강점기 시기 경복궁의 90%가 훼손되거나 파괴되었는데요.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을 매각하는데, 일본으로 많이 팔려갔다고 해요.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전각인 선원전은 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찰인 박문사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1923년 10월 동아일보에는 조선시대 문무의 과거를 돌보는 융무당과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게 되면서 곡괭이에 헐려갔다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광화문도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죠. 일제는 광화문을 헐어버리려고 했지만 생각지 못한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되는데요. 그중 눈에 띄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의 문화예술을 사랑했던 학자,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인데요. 그는 이런 글을 발표하기도 했죠.     


아 광화문이여! 너의 운명이 경각에 쫓기고 있다. 그대를 낳은 민족은 지금 암흑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사람들은 뼈에 사무치도록 그대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마저도 자유로이 나타낼 수 없는 세상이다. 용서해 다오! 나는 죄짓는 자 전부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싶다.

 

(‘사라져 가는 조선의 한 건축을 위하여’ 中 일부-1922년 日잡지 개조)     


일본인의 입장에서도 광화문을 헌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제는 결국 광화문을 헐지는 못하고 1926년 건춘문 쪽으로 옮깁니다. 헐리지는 않았지만 일제가 개최한 조선박람회의 정문으로 광화문을 사용하면서 광화문은 그렇게 또 한 번 가슴 아픈 수난의 역사를 겪습니다.     


- 2023새롭게 다시 돌아온 광화문그리고 왕의 길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죠! 2010년 현판이 한자로 다시 바뀌고 나무를 사용해 복원한 광화문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이후 광화문광장 공사와 월대 복원이 진행되면서 2023년 10월, 광화문이 또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게 되죠.     


2023년 10월 ‘왕의 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월대 복원 후 현재의 모습월대 복원 후 현재의 모습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월대(月臺)인데요. 원래 월대는 월견대(月見臺)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의미인데 건물을 더 웅장하게 보이게 하는 단이죠. 무대와 비슷하다고 보시면 되는데, 중요한 건물에 이 월대를 만들게 됩니다. 광화문 앞의 월대에 대해 정확한 시기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1866년 3월 영건일기의 기록을 통해서 고종 경복궁 중건 시기에 이 월대가 함께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하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기죠. 왜 광화문 밖에 월대를 만들었을까?     


많은 역사학자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자면 먼저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많았고, 백성과 왕이 만나는 소통의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1534년 중종실록을 보면 임금이 참관하는 무과시험이 이곳에서 열렸다고 하고요. 1459년 세조실록을 보면 광화문 앞에서 세조와 정희왕후가 군사시범을 구경했다는 기록도 있죠. 뿐만 아니라 월대 밑에 조선전기의 행사와 관련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행사 시 해를 가리기 위한 천막을 치는 차일고리의 흔적도 보였다고 합니다.      


광화문과 관련한 이 공간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죠?      


‘왕의 길’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당시 복원에 참여했던 학자들이 월대와 관련한 난간, 서수상 복원에 어려움을 겪었었다고 해요. 그런데 시민들의 적극적인 제보와 노력으로 월대난간석은 동구릉에서, 서수상은 삼성의 호암미술관 마당에서 찾아 복원의 마지막 퍼즐을 잘 맞출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호암미술관에서 찾은 서수상호암미술관에서 찾은 서수상

제가 말씀드렸던 광화문의 역사, 생각보다 복잡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는데요. 저 또한 20여 년 전 안내를 시작할 때 제대로 복원되지 못한 광화문의 현판이나 재료, 비뚤어진 축 등을 설명하면서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래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구해서 한참을 설명했었거든요. 


그러나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원래의 모습을 찾아나가는 광화문의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서울 한 복판을 지나가면서 광화문을 수도 없이 지나쳤고 또 앞으로도 많이 마주칠 텐데요. 그때마다 우직하게 역사의 순간을 견디어온 광화문을 따스하게 한 번 바라봐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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