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2일 >>>
영어에 “scream queen (스크림 퀸)”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비명(悲鳴)의 여왕”인데, 공포영화의 여주인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속어다. 대표적인 배우를 꼽자면 “제이미 리 커티스(Jamie Lee Curtis)”. 1978년의 데뷰작 “할로윈(Halloween)”에서 놀랍도록 생생한 표정과 비명소리로 이름을 날린 여배우다. 연속되는 시리즈도 큰 인기를 끌며 그녀는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 1994년 히트작 “True Lies (트루 라이즈)”에선 아놀드 슈워즈네거의 상대역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는다.
공포영화는 봐도, 사실 우리는 공포를 멀리하며 산다. 나도 비명다운 비명은 TV나 영화에서 말고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2018년 어느 여름날, "공포"와는 너무 거리가 먼 환한 대낮, 나는 내 평생 가장 리얼한 비명소리를 들었다. 글자 그대로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아~악! 아~악! 아~~~~~~악!!”
살이 부들부들 떨리는 납빛 얼굴, 너무 질린 나머지 막 숨이 넘어가는...... 실로 섬뜩한 소리였다. 가슴이 철렁, 머리털이 쭈볏해야 할 그 절박한 타이밍에, 하하, 나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깔깔 넘어갔으면 그 웃음을 멈추느라 한참이나 차 문을 잡고 서 있었다. 사연인즉슨 이러했다.
2015년, 우리는 진새골 사랑의 집 “실로암”이라는 건물에 전세를 들어갔다. 백마산 중턱 2층 벽돌 건물. 두부 썰 듯 가로세로 4등분하여 네 집이 살 수 있는 구조에, 우리집은 “2층 안쪽”이었다. 조용하고, 기역자로 산에 접해 있고, 무엇보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돼 좋다며 아내가 택한 위치였다. 따라서 주차장에서 좀 멀었고, 장을 봐 오면 으레 아내는 가벼운 짐만 들고 먼저 들어갔다. 건물 뒤의 쪽대문을 열고, 건물-축대 사이 25미터 골목을 걸어 들어가, 계단을 올라 데크를 지나면 거기가 우리집. 원래 건물 후면 비상구였던 것을 아내가 데크를 넣고 개조, 현관을 삼은 것이었다. 그날도 그렇게 아내가 먼저 들어가자 금세 들려 온 문제의 그 비명! 그것은 천하무적 여전사인 아내가, 그녀 유일의 천적인 "뱀"과 맞닥뜨린 소리였다.
선천적으로 뱀을 싫어하는 아내는 그전에도 뱀을 보면 "악!" 하고 소리는 쳤다. 하지만 그날의 비명은 달랐다. 그것은 단순한 혐오/놀람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일종의 좌절, 절망, 자포자기, 현실부정...... 아니 어쩌면 "종말 선언"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 2~3년, 아내는 뱀 퇴치를 위해 안 해 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면 대략 이렇다.
1. 뱀이 싫어하는 진동/소리를 종일 발생시킨다는 독일제 발명품 군데군데 설치.
2. 잎이나 열매의 향이 강하여 뱀을 쫓는다는 방아, 산초, 봉숭아 등의 나무 심기.
3. 냄새가 역겨운 백반, 나프탈린, 휘발유 등을 건물 주변에 놔 두거나 뿌리기.
4. 큰 바위들을 쌓아서 올린 뒷골목 축대의 사이사이 모든 틈을 시멘트로 메꾸기.
5. 백마산과 우리 2층 데크가 만나는 부분만 망을 쳐서 뱀이 못 건너오게 하기.
특히 4, 5의 조치는 1~3과 달리 "물리적"인 차단을 의미했기에 아내는 매우 흡족해했다. 실제로도 그 뒤론 몇 달 뱀이 안 보였다. 그 안도감, 확신, 평화...... 아름다운 자연, 그림 같은 집...... 아내는 그 이상 행복해할 수 없었다. 바로 그 즈음, 바로 우리 현관에서, 그 모든 것을 일거에 무너뜨린 태연자약한 뱀의 눈빛. 혀 놀림.
“아~악! 아~악! 아~~~~~~악!!”
첫 두 번의 "악!"은 아내의 뇌(腦)가 그 상황을 소위 "프로세스(process)"하는 과정에서의 본능적 반응. 맨 끝의 기다란 "아~~악!"은 상황파악을 종료한 그녀 뇌(腦)의 이성적 결론 --- "아, 내 인생 이제 완전히 종쳤다!" 이것이 아내의 그 처절한 울부짖음에 대한 나의 해석이었다.
내가 그처럼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자지러졌던 이유는 두 가지. 첫째, 보나마나 뱀은 고작 7~80cm일 텐데, 어떻게 마치 8m 아나콘다를 본 듯한 괴성이 나올 수 있는지, 그것이 너무 신기해서였다. 둘째, 영화 속 비명들이 마냥 꾸며낸 연기가 아니라, 사람이 많이 놀라면 진짜 그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싶어서였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바 그날의 그 비명은, 세계최고의 비명 제이미(Jamie)도 흉내 못 낼, 순도 100% "공포의 소리"였다. 평소에도 감정표현/의사전달에 "자유함"이 가득한 아내. 돌아보면 그녀는 그날, 속이 뒤집어져라 "양껏" 질러 댄 비명으로 극한의 공포를 이겼던 것이다. 그날도 애꿎은 119만 죄인처럼 불려왔다 헛걸음을 치고 갔다. 왜 이리 꾸물대느냐며 성화를 부리는, 불같은 독촉전화에 시달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5년을 진새골에 더 살다가 2023년에 이사 온 양평의 작은 전원주택. 우리는 오자마자 "뱀" 사정이 어떤가 체크에 들어갔다. 서쪽과 북쪽은 콘크리트 벽이라 걱정 무(無). 남쪽은 너비 9cm, 높이 1.8m, 긴 나무 판자로 담을 20m 친 터라 거기도 이상무. 유일하게 동쪽만 앞이 탁 트인 소위 "논뷰(논-view)". 하지만 진새골과는 달리 뱀이 몰래 숨어 다닐 숲도 계곡도 없고, 60도 경사면 바로 밑에 훤히 펼쳐진 논...... 우린 일단 크게 염려할 것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양평도서관에 앉아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다. 마치 누가 옆에서 엿듣기라도 하는 듯, 모기 만한 소리로 아내가 속삭였다.
"여보, 지금 우리 논 쪽 화단에 뱀이 한 마리 똬리를 틀고 있어요. 집에 오면 나한테 오지 말고 곧장 뒷문으로 가서 그것부터 처리하세요. 뱀은 안 죽이면 반드시 다시 찾아와요."
가서 보니 아내의 말 그대로였다. 날이 며칠 흐리다가 볕이 나자, 뱀이 몸을 말리며 낮은 풀숲에 앉아 있었다. 똬리를 풀면 110cm는 족히 될 듯한, 지름 4cm의 꽤 큰 놈이었다. 평생 파리, 모기, 바퀴벌레, 쥐 등을 수도 없이 잡아 봤던 나. 뱀은 진새골에서의 일천한 경험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못할 것이 없었다. 그것도 뱀이라면 질색하는 아내의 "즉시 제거" 명령이 떨어진 상황임에랴! 6~70cm 길이의 녹슨 집게를 들고 씩씩하게 다가갔으나, 여전히 유유자적한 뱀의 자태......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추호의 도피의사/전투의지도 없는 순진무구한 짐승을 쳐죽임은 진실로 비인도적인 처사. 비닐 봉지에 넣어 먼산에 버리고 올까 하다가, 그냥 집게로 집어 최대한 멀리 휙 던져 버리는 선에서 일을 끝냈다.
약간 꺼림칙했지만 방에 가서 사실대로 아내에게 보고를 올렸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아서 그랬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앉아서 듣다 말고 조용히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내 입에서 "뱀"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파랗게 질렸고, 점차 몸에 경련까지 일으켰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내의 증세는 단순한 "뱀 혐오"가 아니었다. "뱀공포증(ophidiophobia, 오피디어포비아)"이라 하는 병이었다. 더 이상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잘못했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죽이겠다고 싹싹 빌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내는 철망을 --- 시골에서 흔히 "독사망"이라 부르는 것을 --- 치자고 했다. 나는 즉시 철물점으로 달려가 너비 85cm, 길이 20m, 철망을 한 롤(roll) 넉넉히 사 왔다.
또 뱀이 나타날까 봐, 아내는 먼발치에서 지시만 했다. 85cm 너비 중, 15cm는 땅에 묻고 70cm를 땅 위에 세우라고 했다. 60도 가파른 경사에 수십 번도 더 미끄러져 가며, 나는 총 10시간 고군분투했다. 매 75cm 간격으로 쇠막대를 박아 거기에 망을 고정해 가며, 총 15m의 독사망을 완성한 것이다. 과연 그게 끝이었을까? 다음 날, 10cm 실뱀이 출현해 또 한바탕 소동이 있었고, 나는 당당히 첫 "킬(kill)"을 선보임으로 전일의 구겨진 체면을 조금 만회했다. 그 새끼뱀이 나무 담의 목재들 틈새로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며, 아내는 20m 담 전체를 바닥에서 50cm 철망으로 막으라고 했다. 철망을 더 사 와서, 또 5시간 작업을 완료했다. 아내는 멀리서 한번 보고 오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더니, 아무래도 보기 흉해서 안 되겠다며 다시 뜯으라고 했다.
하하, 내가 교회 가서 인간 된 것이 바로 그런 것, 즉 그런 상황에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었다. 옛날 같았으면
"야, 장난치나? 지금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가, 뭐꼬?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 니가 해라!"
하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그 철망을 다 뜯어 냈다. 사무용 호치키스의 큰형님뻘인 공업용 태커(tacker)를 쏘아 아주 단단히 나무에 고정시킨 철망. 그 수백 발의 핀을 일일이 하나씩 뾰족한 집게로 집어 빼냈다. 그리곤 새로운 지시에 따라, 5mm 이상 틈새에만 쫄대를 밀어 넣어 실뱀의 출입을 원천봉쇄했다. 실수로 대문을 열어 놓지 않는 한, 크고 작은 어떤 뱀도 더 이상은 우리집을 방문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동쪽의 독사망과 남쪽의 나무 담, 나는 휴전선 철책을 돌듯 매일 아침 점검을 돈다. 밤새 뚫리거나 느슨해진 데는 없는지, 여기저기 손으로 만져도 보고 막대기로 눌러도 본다. 만에 하나 뱀이 들어와도, 아내가 감쪽같이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키포인트! 하하, 따라서 나는 "일격필살(一擊必殺)"의 내 각오 또한 늘 함께 점검한다. 아내는 한 쪽 갑상선 제거 수술을 받은 준(準)환자. 체력이 보통 사람의 절반에다, 특히 스트레스가 치명적이다. 제이미(Jamie)를 능가하는 "비명의 여왕" 나의 아내. 그 비명이 천하일품이긴 해도, 또다시 그것을 듣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부디 뱀들이 자제해 주기를 바란다. 혹 운명적으로 나의 공격에 쓰러진다 해도, 그것이 나의 본심은 아님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나는 뱀이 미운 것이 아니다. 단지 아내를 사랑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