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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믿음 소망 사랑

by 김지민

2025년 7월 9일 >>>


언제부턴가 성경(聖經) 구절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들이 연상된다.


우선 "믿음"이라 하면, 완벽히 세척된 빛나는 유리잔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밑에 가늘고 긴 손잡이가 달린, 하얀 테이블보 위의 고급 물잔. 한때는 얼룩투성이였던 잔. 하지만 이제

"제 아집의 때는 말끔히 씻어 냈습니다. 부어만 주십시오,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며 채워지길 기다리는, 그런 멋진 잔이다. 자기부정(自己否定)이 반드시 완벽한 신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내가 틀렸음"을 깨닫는 지혜, 세세히는 몰라도 큰 윤곽을 파악하고 무릎 꿇는 겸허함, 다시는 돌아섬이 없는 부동의 방향 정립을 암시한다. 그래서 나는 "믿음" 하면 그런 깨끗한 잔이 생각난다.


그리고 "소망" 하면, 시원한 생수로 그 빈 잔이 채워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맑고 투명한 물줄기, 해갈을 맞이하는 설레임, 무지가 깨달음이 되는 경이, 인생의 긴 잠을 깨우는 생명의 물소리...... 잔이 점점 차오르면 가슴 또한 벅차오르고,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휘감는다. 막연하던 믿음에 증거가 보이고, 철없던 옛 삶이 부끄러워지고, 한없는 감사가 터져 나온다. 소망은 움직임, 출렁임, 꿈틀거림이다. 가령 "믿음"이 하늘을 가리키는 손짓이라면, "소망"은 그곳을 향한 종종걸음. 믿음과 소망은 별개가 아니고, 정(靜)과 동(動), 비움과 채움, 겉과 속, 즉 하나다.


끝으로 "사랑" 하면, 그 잔을 다 채우고 "유유히 넘치는" 물이 연상된다. 나는 잔, 물을 따르는 이가 아니다. 나는 단지 통로, 물이 나를 지나 흐를 뿐이다. 내가 기울여 물을 쏟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는 물이 자연스레 차서 넘치는 것이다. 8층 높이, 204개 유리잔의 "샴페인 타워(champagne tower)"를 상상해 보라. 1+4+9+16+25+36+49+64=204. 맨 꼭대기 1개의 잔에 솔솔 붓는 물이 층층이 넘쳐 내려 모든 잔을 채운다. 나는 깨끗이 씻기어 거기 서 있을 뿐, 아무 하는 일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다 이루어진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 사랑임은, 그것이 순리(順理)의 끝이요 믿음/소망의 궁극이기 때문이리라.


나 자신의 경우, 컨디션이 좋으면 잔이 깨끗할 때도 간혹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못 가고, 늘 금방 얼룩이 지고 흙이며 먼지가 쌓인다. 게다가 내 잔은 지긋이 자리도 못 지킨다. 생수가 지겨워서 틈만 나면 와인 병, 생맥주 꼭지를 찾는다. 결국 내 신앙은, 3차까지 있는 시험에서 겨우 1차만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형국이랄까? "사랑"으로 흘러넘치기는커녕, "소망"도 없이 간신히 "믿음"에만 간당간당 매달려 있는 상황? 물은 모름지기 깨끗한 잔에 붓는 것이다. 흙이 들어갔거나 이미 흙탕물이 든 잔은, 물을 부어 흙탕물만 더 만들 뿐. 그런 잔에 귀한 생명의 물을 부으실 리 만무하다. 오늘 내 잔이 빈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몇 년 전에 듣고 좀처럼 못 잊는 일화가 하나 있다. 아프리카 오지를 자진해 들어간 어느 미국인 선교사. 평생을 그곳의 부족을 위해 살다가 마침내 거기서 생을 마감했다. 뒤늦게 취재를 간 기자가 부족 한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 대답이 인상적이다.

"선교사님께서 하신 설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설교는 기억나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셨다는 것 하나는 확실히 기억합니다."

진정 소중한 것은 구체적으로 머리에 남지 않는다. 아련하게 그 이미지가 가슴에 남는다. 선교사님의 사랑은, 믿음/소망/사랑 중에 제일이라고 하는, 바로 그 "궁극(窮極)의 사랑"이었음이 분명하다.


해외에서 자란 교포 청년이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와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하는 말,

"교회들이 건물은 전부 굉장한데요, 그 어디에도 예수님이 안 보여요."

맞다. 한국 교회엔 예수가 없다. 행사만 많고 "사랑"이 없다. 그러나 지난 11년, 나는 딱 한 분 예외를 보았다. 천사 같은 권사님. 그 눈빛에 삶에 사랑이 넘쳐나셨던 분. "저런 분이 교회에 계시기도 하네" 싶던 귀한 분...... 작년에 꽃다운 64세로 하늘 품에 안기셨다. 베풀기만 하시다 정작 자신은 못 돌보셨을까? 병이 깊어지시자 너무 안타까워 내가 "철야기도회 한 번 하자" 했다가 무안만 당했다. 교인들이 하나같이 못 들은 체했다. 저마다 달랑 봉투 하나씩 들고 장례식장 간 것이 결국 전부였다. 사랑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무시무시하다.


그간 교회를 다니면서 솔직히 나는 괴로웠다. 뭔가 너무 앞뒤가 안 맞다 생각됐기 때문이다.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은 다 주옥 같은데, 왜 교회들은 전부 이 모양일까? 기독교인이 1천만 명이라는데, 어떻게 나라가 이 지경까지 왔을까? 믿음, 소망, 사랑 운운하는데, 도대체 어딜 가면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나...... 그러나 이젠 그 괴로움이 훨씬 덜하다. 나처럼 "준비 덜 된 잔"들이 수두룩하다 생각하면 상당 부분 설명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헛된 이념, 자신의 개똥철학, 거짓된 과학 등의 불순물 가득한 잔에 억지로 물을 채워 세상에 흘려 붓는 이들도 많다 생각하면, 거의 모든 수수께끼가 다 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생수"를 담은 맑은 잔들이 마음에 큰 위안이 돼 주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의 진정한 크리스쳔이 몇이나 될까? 흔히 말하는 천만 명은 분명히 가짜, 사이비, 자칭 교인을 다 포함하는 수치일 것. 크리스쳔은 천만 명이 아니고, 사실은 천 명이라고 누가 속삭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방방곡곡에 숨은 그 보석 같은 분들을 차례로 찾아다니며 내 남은 생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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