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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일

조월,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 (feat. 해파)〉

by 묵온

(2024. 12. 27. 발매)


대학 첫 학년의 봄날,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와 캠퍼스를 뛰어 내려갔다. 비탈에 있는 동아리방 건물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하나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는 어렴풋하다. 이 정도 거리면 십 대 때는 한달음에 갔을 텐데 이제는 숨이 찬다고, 스무 살이었던 친구가 스무 살이었던 내게 말했다. 어디를 신나게 달려 본 일이 많지 않았던 나도 그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강변을 달리는 지금 스물의 체력만 돌아와도 감지덕지인 내게 이 짧은 장면은 추억의 시원(始原) 같다. 타인과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야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그 찰나가 관계로 지속하는 계기는 이 달리기가 거의 처음이었으므로.¹

추억은 시간이 아깝지 않을 때만 쌓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에 몰두할 때는 그 밖의 것을 모두 잊으니 시간 또한 의식할 틈이 없다. 그토록 호기롭게 시간을 흘려보내다 예전에는 참을 수 없었던 일을 이해해 보려는 자신에게 놀라는 나이에 이르면, 이미 쌓아 둔 시간의 더미 주위로 떨어진 사금 같은 일각까지 그러모아 낭비를 보상한다. 반추하는 내가 기억 속의 나와 다르다는 것을 공연히 깨닫는다. 망가졌는지 넓어졌는지, 그때 나를 알았던 이가 내 눈앞에 다가와 확인해 주었으면.


오늘날의 대중음악에서 필연성이 약해진 이유 중 하나는 한 곡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주체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곡은 시간의 흐름을 축으로 하는 수평적 단위와 동일한 시점의 음역 혹은 역할을 축으로 하는 수직적 단위로 분석할 수 있다. 전주, 버스, 코러스 등을 수평적 단위라 하고 비트, 화성 반주, 멜로디 등을 수직적 단위라 한다면 각 작곡가에게서 하나의 단위나 그보다 작은 요소만 취한 뒤 블록을 맞추듯 조합해 3분 내외의 곡을 완성하는 일이 가능하다. 이런 분업에서는 곡의 기둥을 세우는 주체가 없거나 기둥이 있더라도 굵지 않으니 일관적인 서사 대신 단편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데 주력하는 편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유리하다.

독립음악가가 이렇게 작업하는 사례는 드물다. 싱어송라이터나 밴드가 곡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하거나, 협업을 하더라도 곡의 주인이 세션이나 피처링 아티스트 등 소수의 음악가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곡의 방향을 결정한다. 실은 이쪽이 더욱 전통적인 작곡 방식이지만 개별 주체가 자신의 뜻을 관철해 만드는 음악을 ‘대중음악’이라 불러도 좋을지 의문스럽다.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만들기는 하지만 나 말고는 아무도 이 노래를 듣지 않으리라는 체념은 십여 년 전 나의 뒤에도 늘 따라다녔고 지금 활동하는 음악가들도 조금씩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이 체념을 극복하거나 떠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독립음악을 계속하는 것이라면 그 원동력은 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는 개인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믿음일 테다.

조월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한국 독립음악의 역사를 되짚는다고 하면 무척 어색하다. 그 이름이 환기하는 서정은 머릿속에 들어오려는 세상을 완벽히 차단하고 마음 깊이 잠기려 하는 이가 자신 못지않게 쓸쓸한 사람의 독백을 찾는 상황에 어울린다. “장르나 양식이라는 걸 (중략) 건조하게 거리를 두고 보는” 음악가가 “팝 음악에 대한 깊은 사랑”과 “통속적이거나 대중적인 것과는 다른 방향에 있는 것들”²을 섞어 만든 곡에 무슨 딱지를 붙일 것인가. 큰 흐름으로 묶는 작업은 수많은 음악을 신속히 정리하고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만 어느 갈래로도 묶이지 않는 노래를 빠뜨리는 오류를 내포한다. 그때 놓치는 아름다움은 얼마나 찬란하며 고유할지.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의 화자는 “한 십 년 만”에 상대를 만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말하고 들으려 한다. “사는 게 늘 덜컹기리기만” 하고 “모든 게 결국 돈 얘기가” 된다는 진술로 자신의 현실이 녹록지 않음을 암시하는 한편, 하소연은 그 정도에서 거두고 “그 시절에 대해”, “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청한다. “너라면 나를 모르는 척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기대어. 내가 너를 보았던 경험을 상기하며 그 과거를 현재로 불러온다. “잠깐 이대로 앉아 있”는 시간이 지나면 만남은 끝나겠지만, 두 사람은 “그 모든 게 정말 있었던 일”³이라는 확신을 얻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를 조월의 다른 곡인 〈어느새〉와 비교하면 동전의 양면 같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면 사랑 따위가 내 알 바 아니지”라는 첫머리에서 드러나듯 〈어느새〉의 화자는 대화 대신 독백을 한다. 상대가 “이름 한 자도 모르는 사람”으로 남아 있을 만큼 두 인물이 나눈 교류의 깊이에는 한계가 있는 듯하다. “사랑이 다신 오지 않을 것처럼”, “다신 만나지지 않을 이들처럼”이라는 말을 “어리석게(도)”⁴로 한정해 그리운 사람을 언젠가 다시 볼 것이라 낙관하는 듯하지만 이는 어쩌면 절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앞으로 만날 사람이 예전에 스친 인물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고, 화자가 그 새로운 이들의 이름도 전혀 알지 못한 채 끊임없는 열망에 시달린다면.

기약 없이 흘러간다는 점에서 〈어느새〉는 부초를 닮았고, 물살에 휩쓸리면서도 기억이 자신을 붙잡아 주리라 믿는다는 점에서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는 닻을 연상시킨다. 영영 떠나는지, 끝내 돌아오는지. 이동성의 차이는 말뿐 아니라 곡에서도 드러난다. 키보드와 목소리만으로 시작했다가 간주 이후로 모든 악기가 합류해 페이드아웃으로 진행을 무한히 연장하는 〈어느새〉와 달리,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는 처음부터 대부분의 악기가 연주에 참여하되 강약과 리듬을 더 복잡하게 조절하며 곡을 전개하다 페이드 없이 확실한 마무리를 한다. 〈어느새〉가 버스-프리코러스와 코러스 이후의 조를 서로 다르게 배치한 반면,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는 여러 번의 전조를 거치다 결국 처음의 조로 되돌아가 끝난다. 선율의 경우 〈어느새〉는 후렴에서 큰 변동이 없다가 페이드아웃 구간에서 날아오르고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는 후렴에서 정점에 도달한 뒤 종결부에서 내려앉아 대조를 이룬다. 말과 소리가 한결같이 조응한다는 점에서 두 곡은 아름답다.

〈어느새〉의 데모가 2012년에 녹음되었고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가 2024년에 발표되었으니 둘 사이에는 십여 년의 간극이 있다. 근거 없는 인상일 뿐이지만, 숨은 음악을 사랑하는 뭇 사람들에게 〈어느새〉가 끼친 영향을 모른 채 두 곡을 같은 날 처음 들었더라도 나는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가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것만 같다. 예상 밖의 일이 닥치겠거니 짐작하는 것과 예상치 못한 일을 실제로 겪는 것은 다르며, 그 경험이 대개 쓰라리다는 점은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만 당연하므로. 이 통증의 원인은 복수의 가능성이 주어졌을 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더 나은 결과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는 후회다. 시간이 새기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갈림길 앞에서 망설여 본 적이 없다는 뜻이며 사람 한 명 한 명마다 판이한 경로를 밟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너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아무래도 이제 나는 미련보다 경청이 훨씬 사랑에 가깝다고 여긴다.


풍파에 닳았다고 해서 반드시 귀를 여는가. 귀를 열었다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을 찢기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어느 가까운 사람을 보고 깨달았다. 누군가 해를 입었으며 고통을 받았다고 고백할 때 그 사람은 발화자의 아픔을 가늠하지 않고 그 뒤에 의도가 숨어 있다고 가정했다. 제지당하지 않으면 자신의 설을 몇십 분씩 펼쳤고, 끝을 알 수 없도록 늘어지는 언사에서 애초에 괴로움을 토했던 이는 희미해졌다. 이미 신음하는 이를 굳이 난자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고, 그 공격이 나를 향하지 않는데도 내가 보았던 온화한 얼굴의 입에서 쏟아졌다는 사실에 아연했다. 아픈 자가 나였다면. 고초를 겪은 이가 당신과 아는 사이라 당신에게 직접 사정을 알렸다면. 개인의 억울이 그 한 사람의 응어리로 남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람의 말과 글로 옮겨질 때, 그 모든 이들이 비밀 세력의 사주로 준동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리에 자기를 포개어 본 끝에 이야기를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당신이 믿을 수 있었다면.

2024년 12월에 내가 참석한 집회에는 가지각색의 깃발이 나부꼈다. 정당이나 조합의 표지보다 단연 돋보였던 것은 없는 단체의 이름을 빌려 각자의 성격, 관심사, 상황 등을 내건 문구였다. 서너 글자로 간결하게 압축하기 어려워 보이는 명칭을 떠올린 이 사람들은 그동안 엄연히 제 몫의 생활을 영위했을 테고 별일이 없었다면 서로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하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삶들을 눈여겨본 적 없는 권력자(들)의 무지다. 영향력의 불평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슬프지만, 그 모든 생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표자가 무감할 때 주권자의 안전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그이들의 허망한 죽음을 막고자 광장으로 나왔을 것이다. 2022년 이후, 2014년, 혹은 어느 때라도 뜻하지 않게 죽은 이들과 그 곁에 남겨진 이들을 기억하며.

기억하고자 하는 이 개인들을 하나의 편으로 묶는 것이 내게는 마땅치 않아 보인다. 음악을 장르로 묶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인을 진영으로 묶을 때도 누락과 망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평면 위의 점이 다른 점들을 바라볼 때는 별도의 차원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 모든 점들을 아우르는 영역을 바라보아야 한다면 관찰자는 평면 바깥에 있어야 한다. 1인칭과 3인칭의 차이. 3인칭 시점을 취하는 행위는 자신을 멀리서 응시하는 객관화일 수도 있으나 연루를 부인하는 타자화일 수도 있다. 영역 내 점들 사이의 거리를 무시한 채 섣불리 당위를 부르짖는다면 후자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조월과 함께 참여한 〈아니 어떻게 이렇게〉 인터뷰에서 모임 별의 조태상이 “신(scene)을 얘기하려는 사람들은 주로 그걸 착취하려는 사람들이었어요. 그걸 목청 높여 말하는 사람들은.”⁵이라고 말했듯이. 개인보다 대중을 겨냥해야 하는 정치가의 전략에 사람들이 자주 실망하는 이유일 것이다.

개인들을 위한 정치는 가능할까. 익히 알려진 속성을 변수 삼아 방정식에 대입하는 계산 대신, 세상에 하나뿐인 이야기들을 엮어 보편을 움직이는 기록이 언젠가 등장할까. 유일한 서사를 쌓아 왔으면서도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해 ‘대중’에 속할 수 없었던 개인들이 나의 삶을 몇 차례 스쳤을지. 앞으로 다시 십 년이 지나고 나서 마주쳤을 때는 모르는 척하지 않고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청할 수 있을지. 언젠가 당신과 나의 삶이 끝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 한 번이라도 확신할 수 있을지. 집회가 거의 한 달째 이어지던 와중에 공개된 노래가 내 안에서 하염없이 맴돌던 의문들을 단숨에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 아름다워 나는 울고 싶었던 것 같다.


캠퍼스를 함께 내달렸던 친구는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아이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는 내가 아닌 삶의 무게를 내 어깨에 지는 모습을 그리기 어렵다. 친구의 아이가 태어난 이후 우리는 단 한 번 둘이서만 만나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삶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던 그쪽이 주로 말을 했는데, 예상대로 양육이 고되지만 의외로 뒤따라오는 이점도 있더라는 이야기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가 내게는 예상 혹은 의외가 아니라 틈입이었다. 나의 위치에서 무엇이 그렇다거나 아닐 것이라 추측하는 일이 아니라 바깥에 있던 세상이 불쑥 나의 위치로 들어오는 일. 친구와 나의 세상은 갈라졌지만, 그 사실이 친구도 나도 첫 만남부터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2025. 2. 19.


¹나는 한국의 청소년이 폭력 없는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늘 의심한다. 나의 경험이 빚어낸 편견이기를 바랄 뿐이다.

²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 조월〉, https://www.weiv.co.kr/archives/24284, [weiv], 2020. 1. 23.

³조월, 〈당신의 사랑을 빌미로〉.

⁴조월, 〈어느새〉.

⁵〈[아니어떻게이렇게 5-2] 모임 별 편 / 까르보 불닭면 이라는 가능성〉, https://www.youtube.com/watch?v=tFViUvWoJPk, 9:43, ‘아니 어떻게 이렇게’ YouTube 채널, 2019.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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