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취향대로 이야기하는 한국 순정 만화
천계영, 천계영
90년대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그 시절에 만화를 본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작가 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천계영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다소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그 거대한 파도 같았던 시류 속에서 조금은 휘말려가면서도 숨길 수밖에 없었던 저항감으로 서 있었기 때문일 거다.
당시 여고생 사이에서 천계영 작가에 대한 환호는 대단했다.
[언플러그드 보이]가 등장하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림체와 일상에서 보기 힘든 유일한 캐릭터성에 모두가 환호했는데 아직 나는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순정 만화에 대해 떠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당시의 감상과 기억을 가벼운 마음으로 수다 떨듯이 말하고 싶었기에 [언플러그드 보이] 뿐 아니라 이후에 언급될 많은 작품들에 대해, 내용이 틀리거나 지금 다시 본다면 깨달을 수 있는 부분을 놓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언플러그드 보이]에 대한 나의 감상은 여고생이었던 나의 감상에 머물러 있음을 미리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도 이렇게 변명 같은 것을 해 놓을 정도로 당시의 인기는 매우 일방적이었다는 것.
나의 저항 지점은 흐물거리는 움직임과 길게 늘인 신체 구조와 같은 낯선 그림체였다. 순정 만화 특징상 얼굴이 작고 신체 비율이 8등신 정도 되는 남녀 주인공들이 다수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직선으로 서 있긴 했으니까. 그런데 [언플러그드 보이]는 긴 허리를 이용해 몸을 2,3번은 구부리고 있는 듯했으니 남주가 잘생겨 보이기보다는 얘 허리랑 무릎 괜찮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슬플 때 왜 힙합을 추냐고...
물론 듀스를 좋아했지만, 듀스를 힙합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들었던 나로선 작품을 대표하는 명대사라기보다는 응? 이 되어버리는 대사였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절대 생각할 수 없었던, FM타입의 학생이었다. 학교를 다니지 않고,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다니며, 내키는 대로 춤을 추는 아이가 이렇게 착할 수 있다고? 뭔가 쓰다 보니 당시의 고지식했던 나를 반성하게 되네.
어찌 되었든 정말 인기가 많았고, 많은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우연히 '강현겸' 같은 남자사람친구를 줍기를 원했기에 작품에 대한 환호를 들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넘기곤 했다. 더불어 당시 내가 사랑했던 H.O.T. 의 뮤직비디오와 문구류 굿즈가 천계영 작가의 멤버별 캐릭터로 나와, 캐릭터별로 공책 시리즈를 완성하여 들고 다니기도 했다. (솔직히 희준이 오빠가 이렇게까지 곱상하지는 않지 않나요?라는 느낌으로 그 캐릭터들을 골똘히 바라본 적은 있다.)
이런 환경에서 차기작으로 나온 [오디션]은 강력하지만 어딘가 떠 있는 것 같았던 인기가 대중적으로 탄탄하게 뿌리내린 느낌이었다. 1집 데뷔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신인 아이돌 가수가 2,3,4집까지 실력을 증명하면서 호불호를 떠나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인정받은 느낌이랄까. 전작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순정 만화 작품이 남녀노소를 넘어 모두에게 인정받는 것은 이 장르의 팬으로서 매우 뿌듯한 일이었다.
슈스케도 프듀도 나오기 전에 심사위원과 팬들의 투표를 통해 서바이벌로 유명 레이블의 데뷔팀을 결정한다는 설정이라니. 지금이야 워낙 많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있어 그게 뭐 대단할까 싶지만, 당시엔 신선함 그 자체였다. 물론 많은 대결물 만화를 보아 온, 특히 남성 독자들은 천하제일 무술 대회를 밴드로 바꾼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심지어 상대팀 중에 드래곤볼도 있었지), 그런 설정 덕분에 순정 만화라는 허들이 다른 작품에 비해 낮았던 걸지도 모른다.
토너먼트 방식의 설정이 빛날 수 있도록 재활용밴드의 성장에 필요한 상대팀의 사연은 제각각 흥미로웠고, 그에 대응하는 재활용밴드의 기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10권이라는 꽤 긴 이야기를 끝까지 몰입감 있게 볼 수 있었던 건 그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송송 회장이 딸인 명자에게 남겨주고 싶었던 건 업계 톱티어의 레이블과 막대한 유산이 아닌,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무수한 고난을 통해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팀으로 프로듀싱하는 경험, 개성 강한 천재들이 원팀으로 강력하게 묶인 훈련된 밴드, 그들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자극이 되어 줄 압도적 라이벌이었다는 게 정말 고마웠다. 그래서 마지막에 우승을 하지 못한 게 뻔하다면 뻔할 수 있겠지만 정말 정답이었어요, 회장님!
상대팀과의 대결들 모두 의미가 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주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꼽아 보자면 나는 '이노무시키'와의 대결이다. '이노무시키'는 어린 시절 신동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성대결절로 가수 생활을 그만두고 모두에게 잊히자, 티베트로 가 섀도우 창법을 익혀 괴물과도 같은 존재로 다시 돌아온 인물이다. 상대 인물 특성상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재활용 밴드에서 보컬인 황보래용인데, 처음으로 자신의 보컬 기술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득음을 했다는 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머물며 폭포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고 높이며 세간의 방식으로 고생을 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고, 산에서 내려와 명자를 만나 이렇게 외친다.
"누나, 나 득음 안 할래!"
이 말을 하는 황보래용의 얼굴이 어찌나 환하게 빛나던지 명자는 '앗, 눈부셔!' 라며 함께 환하게 웃어준다.
또 명자가 황보래용 몰래 그 근처에서 많은 이들이 득음하는 것을 직접 들어온 할머니를 찾아가 우리 애가 득음을 했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있는데, (할머니를 대신해 온갖 허드렛일을 다 하고 나서야 겨우 대답을 얻는다. 하지만 이 고생은 모두 할머니가 래용이에게 닭백숙을 끓여주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할머니는 득음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하지만 아주 귀한 놈이다라고 답하며 닭백숙을 끓여 애 먹이라고 전해준다.
득음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황보래용과 귀한 놈이라고 평가한 할머니의 대답의 의미는 내가 소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으로 밝혀진다. 현란한 보컬 기술로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고음을 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즐겁고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는 게 중요하다라는. 전자의 경우에 관객은 재주에 대한 신기함에 박수를 보낼지 모르지만, 후자의 경우에 관객은 가수와 노래와 하나 되어 함께 즐거워하고 감동받을 수 있다라는. 이 에피소드는 주요 장면이 지금도 한 컷 한 컷 떠오를 만큼 기억에 깊게 남아 있다.
황보래용에게 진 '이노무시키' 찾아와 어떻게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앞서 대결한 '청학동 댕기즈'에게 들었던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지지자는 불여호지자요, 호지자는 불여낙지자라)는 공자님 말씀을 전해준다.
틀림없는 말씀이긴 하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를 지금 다시 떠올리면 '나'를 내세우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황보래용 같지 못했던 과거의 나의 모습 몇몇이 떠올라 씁쓸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말이다.
[오디션]은 재활용 밴드와 송명자가 성장해 가는 에피소드가 다양하고 극적이다. 그래서 누가 보더라도 어떤 에피소드에선 나의 모습, 나의 상황을 떠올리며 위로를 얻게 된다. 그리고 끝내야 할 가장 적합한 시점에 대결을 끝냈다. 그만큼 상대팀 설정과 대결 내용이 작품 전개에 필요한 것으로만 군더더기 없이 탄탄하게 짜여 있다. 만화가 완결되고 나서,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완결을 냈을까 감탄할 정도로.
아직도 천계영 작가의 그림체를 보면 흠칫하지만, [오디션]은 어느 순간부터 그림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고, 어느 순간엔 꼭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깨달음이 나오니 보지 않았다면 꼭 한 번 보기를. 기회가 된다면 각자의 마음에 크게 들어온 에피소드와 상대팀에 대해 잔뜩 이야기하고 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