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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by 램프지니

어릴 적, 엄마는 종종 누룽지를 끓여 주셨다. 아플 때, 혹은 속이 더부룩해 밥이 먹기 싫다고 할 때,

엄마는 망설임 없이 누룽지를 준비하셨다.

따로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내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셨다. 누룽지는 그렇게 내 마음을 데워주던 음식이었다.


어느새 나는 엄마가 끓여 주던 그 누룽지를 스스로 끓여 먹는 나이가 되었다.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몸이 으슬으슬할 때, 또는 이유 없이 마음이 허기질 때, 나는 습관처럼 냄비에 물을 붓고 남은 밥을 누룽지로 끓인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며 먹다 보면, 어릴 적 부엌에서 들리던 엄마의 발걸음 소리가 아득하게 떠오른다.


누룽지는 시간이 만들어 낸 음식이다. 막 지은 밥이 아닌, 조금은 남은 밥, 조금은 눌어붙은 밥. 시간 속에 눌리고 눌려 깊어진 그 맛이, 어쩌면 삶과 닮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 모자라고 눌어붙어도 괜찮다고, 누룽지는 조용히 말해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뜨거울 때는 몰랐던,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알아차리는 마음.

나를 살뜰히 챙겨 주던 엄마의 그 마음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아이가 몸이 아플 때, 마음이 힘들어 보일 때, 나는 조용히 누룽지를 준비한다. 엄마가 나를 위해 그랬듯이, 나도 아이에게 아무 말 없이 그 따뜻한 한 그릇을 건넨다. 목 넘김이 수월하고 고소한 맛까지…

아플 땐 간이 센 음식보다 이런 누룽지 한 그릇이 참 위로가 된다.


누룽지 한 숟가락을 식혀 아이 입에 넣어줄 때마다

“이건 약밥이야. 먹으면 금방 좋아질 거야.”

그 한마디에 내 바람도 함께 담았다.

감기에 걸렸든, 몸이 으슬으슬했든

조금만 먹고 나면 금세 기운을 차렸다.


언젠가 한겨울, 아이가 어렸을 때 고열로 이틀째 앓던 적이 있었다.

한밤중에 이마를 짚어보니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여전히 뜨거웠다. 열 때문에 토하고 기운이 없는 아이가 걱정되고 어찌해야 하나 싶어 조용히 주방으로 나가

냄비에 누룽지를 푹푹 끓였다.

작은 스푼으로 식혀가며 천천히 입에 넣어주었다.

눈을 반쯤 감은 채 받아먹던 아이가 중간에 툭하고 말을 내뱉었다.


“엄마, 이거 먹으면 진짜 낫는 것 같아…”


그 말에 울컥했던 나는,

아이가 다 먹을 때까지 숟가락을 놓지 못했다.

누룽지가 몸을 낫게 했는지, 마음을 어루만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눈에 몸이 띄게 좋아졌다.

그날 이후, 누룽지는 우리 집만의 ‘약밥’이 되었다.


나중에 아이가 조금 더 크고 나서는 감기라도 걸리면

“엄마, 나 그 약밥 만들어줘요.”라고 주문한다.

누룽지라는 말을 알면서도 우리는 약밥이라고 불렀다.

아플 때마다 으레 먹어야 하는 필수코스처럼,

누룽지는 그렇게 익숙한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는 누룽지가 약밥이고,

작은 기적을 만든 만병통치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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