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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부터 대학까지

훌륭한 교육 시스템, 그런데 스위스 유학은 왜 유명하지 않을까?

by 스위스 아낙

스위스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교육 시스템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 유수의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한 나라인데, 왜 우리에게 스위스 유학은 고작해야 호텔 경영 정도만 알려져 있을까?


현실적인 이유부터 들자면, 일단 체류비가 비싸다. 학비는 싼데, 뉴욕을 가뿐히 뛰어넘는 생활비라 배보다 배꼽이 크다. 돈 있는 집에서 도피성으로 보내자니, 영어만 해도 되는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추가로 독일어나 불어를 해야 하고 상대적으로 졸업 요건도 까다롭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스위스 유학은 딱히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나고 자란다면, 혹은 주변 유럽 국가 출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스위스 사람들의 교육열은 낮을까? 그렇지 않다. 맞벌이 부부들은 아이가 만 4~5세가 되기 전에 보내는 보육원, 키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키타는 풀타임으로 보내면 기본 월 3,000 프랑 (한화 약 500만 원) 쯤 한다. 여기서 갓난쟁이 아이에게 독일어, 불어, 영어, 중국어를 해준다며 가격을 높이고는 한다. 물론 보육교사의 비율이나 시설의 차이, 이유식의 종류에 따라서도 비용은 천차만별이다. 특히 주재원 비율이 높은 우리 캔톤에서는 국제보육원(?)이 많다. 국제 학교의 전단계쯤으로 보면 되려나.


키타 (Kita) 이후에는 어린이집 (Kindergarten)에 보낸다. 어린이집부터는 공교육의 일환이라, 대부분의 주에서 의무적으로 다니게 한다. 이때부터 집에서 혼자 어린이집까지 걸어 다니는 아이들이 많다. 우리나라처럼 아파트 단지 내의 어린이집이 아니다. 집에서 제법 15~20분 걸어가야 하는 거리도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 스위스 처음 왔을 때 놀랐던 부분이다. 미국에 있을 때 남편이 차로 3분 거리를 태워다 주는 부모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나는 스위스에 와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형광조끼를 입고 걸어 다니는 5살짜리 아이들을 보며 황당해하곤 했다. 덕분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제법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할 줄 알게 된다.


스위스에서는 아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스스로 등하원하는 것은 교육의 연장선으로 보는데, 아이가 자기 주도성과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주변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또한 키울 수 있도록 하는 첫 단계이다. 물론, 처음부터 혼자 오라고 하지는 않는다. 학기 초에 선생님이 아이들과 같이 등하원 경로를 연습하기도 하고, 또래끼리 함께 걷게 하기도 한다. 스위스 어린이집에서 어떤 것들을 가르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글 한편으로 요약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들은 자연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이를 통해 협동심, 사회성을 기르고, 부모와 보육교사는 사회성의 토대가 될 자율성과 독립성을 키워주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어린이집을 다닌 아이들은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 자존감이 생긴다.


어린이집을 지나 초등학교에 진학하면 우리가 말하는 소위 국영수사과 등을 배우고, 초등 고학년 즈음에 진로를 얼추 정한다. 스위스는 모두가 대학을 가지 않는다. 이웃나라 독일과 비슷한 점인데, 십 대 초반에 이미 대학을 갈지, 직업 전문 교육을 받을지에 따라 진학하는 학교가 달라진다. 캔톤 (스위스의 주, 26개의 캔톤으로 이루어진다.)마다 시스템이 각자 다르지만, 일찌감치 두 갈래로 나뉘는 점은 비슷하다. 그리고 약 70% 정도의 청소년들이 직업 전문 교육을 택한다. 이들은 대략 만 15세부터 실무를 익힌다. 덕분에 스위스의 청년 실업률은 전 세계 최저 수준이다.


공부를 못하니 직업 전문 교육을 받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공부를 일정 수준 이상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이들이 대부분 유수 대학의 학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나아가 부모가 학벌이 좋은 집들은 웬만하면 대학 교육까지는 시키려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직업 전문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낙오자나 2등 시민으로 보지 않는다.


스위스의 직업 전문학교에서는 특정 직업을 가지는 데에 있어, 꼭 필요한 기능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르친다. 사실 세상 대부분의 직업이 대학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학벌이 주는 장점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유는 경험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진득한 대학 교육이 필요한 분야가 있고, 부지런히 발로 뛰는 분야가 있으며 이 모두가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데 중요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 대학의 학위가 있다고 해서 으스대지 않으며, 직업 교육을 받은 사람도 자신의 일에 책임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일한다. 숙련도가 높은 기술자들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에, 기술자들 또한 긍지를 갖고 일을 하기 때문에 이런 선순환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대학을 가는 아이들은 어떨까. 국제학교의 경우에는 보통만 따라가도 미국의 아이비리그나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릿지는 가는 편이다. 외국인이거나, 경제적으로 매우 넉넉하거나, 아이가 좀 문제아라면 가장 손 편한 방법이다. 대부분의 스위스 부모들은 내 아이가 공부를 좀 한다, 싶으면 대부분 현지 고등학교 (김나지움)을 보내고, 이후에 ETH (이공계), EPFL (이공계), St. Gallen University (경제경영), 취리히 대학 (인문계) 등으로 방향을 잡아준다. 학부 입학을 한다고 졸업이 보장된 것은 아니며, 학부를 잘 마친 학생들은 보통 석사까지는 따고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imageCarousel.imageformat.lightbox.480709415.jpg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 (출처: ETH 홈페이지)


만 15세 전후로 어학연수도 다녀온다. 스위스의 장점 중 하나이다. 해외로 가지 않고도 외국어를 배우기 쉽다. 우리는 독일어권에 살고 있다. 옆집 토마스 아저씨네 첫째 딸 세레나는 지난봄 로잔 (Lausanne, 스위스의 불어권 도시 중 하나)에서 홈스테이를 하다가 왔다.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로 직접 가는 경우도 많다. 남편 선배 아들 펠릭스는 올여름 프랑스의 몽펠리에 (Montpellier)로 중학교 졸업 여행 겸, 어학 연수겸 다녀온다. 추크에서 자란 둘 다 모국어는 독일어이고, 영어와 불어는 기본으로 하며, 이 외에 기초 스페인어 정도는 여행 다니며 취미로 배운 아이들이다.


서른이 되도록 부모님 집에서 사는 아이들과 15살부터 스스로 어학연수를 선택하여 다녀온 아이들 또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 속도는 매우 다르다. 사실 스위스에서 아이를 안 키워봐서, 다른 공부들은 어떻게 시키는지 자세히는 모른다. 결과론적으로만 접근해 보면, 스위스 아이들은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공부를 훨씬 수월하게 한다. 고등 교육 이후에도, 취업을 하든 학업을 계속하든 기회가 많고 세상 어디로든 문이 열려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같은 알파벳을 쓰는 독일어-불어-영어 3개 국어는 한국어-중국어-영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쉽고, 동양 문학과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유럽 학교들에서 배워야 할 내용은 비교적 적다. 하지만 스위스 아이들이 한국의 아이들보다 공부를 수월하게 하느냐, 어렵게 하느냐의 단순한 비교를 떠나서, 꼭 되짚어 보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부터 '자율성'에 초점을 두고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십 대 때 진로를 직접 '선택'하고, 대학교육이든 직업 교육이든 '책임'을 진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자유''행복'을 느낀다.


한국식 교육이 나에게 남긴 것은 분명히 많다. 서양 철학과 역사, 문학과 음악을 배움으로써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졌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학교 1학년이 되어서나 배울 수학과 과학을 고등학교 때 배우면서 두뇌 회전이 빨라졌다. 수능 때문에 공부했는데 세상을 살다 보니 가장 쓸모 있는 국사는, 한국인 말고는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아는 척하기 좋고 흥미로운 이야기 주제로 좋다. 대신 잘 모르면 망신당하기 십상이다. 유럽에서 내가 루이 14세를 모른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지만, 내 나라 역사를 모른다는 건 도망갈 구석이 없다.


하지만 등수를 다투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했던 공부는 예상보다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때, 패배감을 안겨줬다. 한 문제라도 틀리면 안 된다는 시험에 대한 압박감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어떤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이어졌다. 객관식 문제보다는 에세이에 익숙한 우리 남편은 역사 팟캐스트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이다. 동학농민운동의 순서를 월별로 외워야 했던 나는 유적지 관광을 가서도 연도와 날짜에 집착한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대다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방대한 양의 공부를 한다. 좋은 중학교에 가려면, 경쟁력 있는 고등학교에 가려면, 유명한 대학에 가려면, 성적을 잘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즉, 어린 시절 한 공부들이 출발선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출발선만 강조되면, 아이들은 막연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억지로 견뎌야 한다. 그래서 학습은 부모나 학원 주도로 이루어지고, 친구와의 관계도 일시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반면에 공부가 도착선을 결정하게 되면 과정은 달라질 수 있다. 누구나 출발할 수 있도록 하되, 가는 길이 맞지 않다면 되돌아가는 길도, 옆길로 새는 방법도 알려주고, 각자의 속도에 맞게 도착선을 보여주면 된다. 그럼 도착선까지 가는 길에 새로운 경험을 할 수도 있고, 친구도 사귈 수 있다. 최대 효율로 도착지까지 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가다 보니 맞지 않아 유턴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어떤 경우에도 길을 가면서 배우고 깨닫는 것이 생기며, 그래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다. '공부를 잘해야 의대에 갈 수 있어'와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해'의 차이다. 덧붙여 전자의 경우에는 '의대에 가야 성공한 삶이야'를 내포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 '많은 직업들 중에 의사가 되고 싶다면'을 전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도 이제 어엿한 선진국의 반열에 들었으니, 아이들 교육도 달라지길 바란다. 적어도 어린 시절에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로 키우기 위해 야외 활동과 사회성, 독립성을 기르는 교육을 했으면 한다. 아동기 때는 친구들과 함께 뛰노는 즐거운 유년시절을 누리게 하고, 청소년기에는 세상에는 수만 갈래의 다른 길들이 있으며, 어떤 길을 가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좋겠다. 대학에 가는 것이 끝이 아니라 입학은 시작일 뿐, 앞으로의 수십 년 인생에 놓일 수많은 징검다리 중 하나쯤으로 여길 수 있도록 세상을 먼저 살아간 어른들이 길잡이가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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