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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함께 하는 삶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

by 스위스 아낙

작년 이맘때쯤 각종 포털과 SNS를 달군 '수영해서 퇴근하는 스위스 직장인' 콘텐츠, 진짜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진짜다. 여름철 날씨가 좋을 때면, 업무가 끝난 후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옷가지들을 방수 가방에 담은 뒤, 강이든 호수든 물로 뛰어든다.


스위스 사람들에게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구호나 휴식의 방식이 아니다. 자연은 이들에게 삶의 전반에 녹아 있는 철학이다. 사계절 내내 주말이면 가족끼리 숲으로, 산으로 나들이를 간다. 특히 여름이면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겨울이면 산에서 썰매나 스키를 즐기는 풍경이 흔하다.


물론, 스위스에서도 10대 후반, 20대들은 금요일, 토요일에 술 마시고 다음날 뻗어 있는다. 하지만 30대 이후 가정이 있는 사람이 저녁 늦게까지 외부에 있는 것은 무책임이나 무능함으로 여긴다. 그 바탕에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스위스 사람들에게 배우자와 아이는 '책임져야 할 존재'가 아니다. 이들에게 가정은, 삶의 궁극적인 기쁨이다.


그래서 '희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함께하는 '행복'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그 행복을 자주 공유하기 위해서, 깊은 유대를 맺기 위해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낸다. 희생에 초점을 맞추면 대가를 바라게 되지만, 행복에 초점을 맞추면 지키고 싶은 존재가 된다. 스위스의 가장 (엄마가 되었든, 아빠가 되었든, 모두가 되었든) 은 엣헴-하는 집안의 어른이 아니다. 가족의 행복을 기획하고, 리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함께하는 행복을 위해 나들이를 간다. 야외활동에서 할 수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은 실내활동에서의 그것과는 제법 다르다. 실내에서 하는 활동은 대개 '교육'에 포커스를 두지만, 야외에서 하는 활동은 '교류'에 중점을 둔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실내 활동은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과학관, 키즈카페 등이 있다. 압축적으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의 경험은 일방적이고, 부모는 수동적인 관찰자로서 참여한다. 야외 활동은 산과 바다 (또는 호수나 강)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날이 따뜻하면 패들보트 위에서 노를 젓고, 카누를 탄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낚시를 즐기기도 한다. 자전거를 타고, 테니스나 발리볼을 즐긴다. 날이 추우면 털모자를 쓰고 털신을 신고 썰매를 탄다. 스키를 타러 가서 하루 종일 눈밭에 구르고 나면 아이들도 부모도 피곤해서 스트레스를 잊고 곯아떨어진다. 야외 활동을 같이 하면 아이들과 부모 모두 능동적인 참여자가 된다.


연인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데이트 코스는 밥-> 카페->영화가 아니다. 산으로 들로 하이킹을 가고, 밀도 높은 시간을 함께 보낸다. 액티비티를 같이 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애 초반 영화관에 가자고 하면 남편은 으레 말하곤 했다. '두세 시간 서로 말없이 스크린만 보고 있기는 아깝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둘 다 어딜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수다쟁이에, 나가서 노는 걸 좋아하기는 한다. 같이 보내는 시간이 익숙해진 지금은 영화도 종종 본다. 하지만 서로 알아가는 관계일 때 하는 '데이트'에 있어서 스위스 사람들은 제3의 대상보다는 '상대'를 오래 보고, 깊이 배울 수 있는 활동을 선택하는 편이다. 그리고 자연은 훌륭한 데이트 자원을 제공한다.


물론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친다. 물놀이는 아직 추운 3~4월, 눈은 없는데 해가 짧은 11~12월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가 있다. 부활절, 크리스마스는 하루지만 축제는 두 달쯤 지속된다. 가까운 가족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온 동네가 새 단장을 한다. 애매한 꽃샘추위는 부활절과 함께 봄이 온다는 설렘과 함께 이겨내고, 우중충한 어둠은 크리스마스와 함께 불 밝힌다. 그래서 스위스 여행에는 딱히 비수기라 할 때가 없다. 이미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 있어서, 1년 내내 기승전 가족과 야외활동을 하게 된다.


사진 멀리, 썰매타는 아이들과 어른들.


찬찬히 생각해 보면, 오래전 우리도 그랬다.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그리고 설. 농경 사회였던 우리와, 낙농업 사회였던 스위스의 패턴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도 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익숙했던 시절이 있다. 전쟁 이후 어마어마한 속도의 경제, 사회 발전과 도시 과밀화로 우리 일상에서 자연이 차지하는 부분은 급속도로 줄어들었지만 (미세먼지도 한몫했다), 우리의 기억 저편에는 아직 자연에서 가족들과 함께 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요즘 세대가 점점 균형 있는 삶을 되찾고자 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러닝 열풍, 캠핑 열풍을 보며 느낀다. 조만간 우리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되찾지 않을까 싶다.


메트로폴리탄에서 나고 자란 천상 도시 사람인 나에게 스위스 생활은 솔직히 처음에는 너무나도 지루했다. 하지만 이제는 도심의 아파트 숲보다는 진짜 숲과 나무가 나의 눈을 편안하게 하고, 숨이 트이게 한다. 고층 아파트의 한강 조망권보다는,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나가 뛰어들 수 있는 호수가 반갑다. 때로는 느리고 반복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의 방식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속가능하다. 그 안에는 가족과의 유대, 사람 사이의 정, 자연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깊게 뿌리하고 있다. 그래서 단단하다.


진부하지만 질문으로 글을 마무리해볼까 한다. 스위스에서의 삶은 조용하지만 견고하게,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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