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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주거 형태

아파트 vs. 주택

by 스위스 아낙

서울에서 나고 자라, 도심 아파트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친구가 스위스에 놀러 와 진지하게 물었다. "7시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데, 심심해서 어떻게 지내?" 전통적인 스위스 사람인 시어머니가 서울에 처음 와서 했던 질문과 겹친다.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데, 복잡해서 어떻게 지내?" 순수한 궁금증이었겠지만, 두 사람 모두 섣부르다.


메트로폴리탄에서 나고 자란 도시 사랑꾼이었지만, 이제는 자연과 가까운 스위스 라이프에 적응해 버린 나는 두 질문 모두 이해가 간다. 어릴 때는 서울, 싱가포르, 뉴욕, 상하이 등 도시가 주는 화려함과 편리함이 좋았다. 나이가 좀 들고 나니, 자연이 주는 평온함과 해방감이 좋아진다. 특히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니, 깨끗한 자연과 안전한 주변 환경이 감사하다.


처음 스위스에 왔을 때는 이상했다. 도시가 주는 수백, 수천 가지의 선택지들이 익숙하던 나에게 요가 학원이 집 주변에 딱 하나 있는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핸드폰을 열고 터치 몇 번이면 전 세계 요리가 집 앞으로 배달되는 도시에서 살다가, 유럽에서 가장 흔한 아시안 음식인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려 해도 10분 운전을 해서 나가야 하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부부는 알프스 산맥 어느 깊은 산골짜기 샬레에 사는 게 아니다. 외국인 비율이 가장 높고, 인구 대비 한해 예산이 스위스 내에서 가장 높은 주에 산다.


그럼 개발을 할 만도 하지 않냐고? 작년 기준 출퇴근 시간을 20분이나 단축시킬 수 있는 터널 개발은 무산되고, 호숫가 근처로 모래사장을 만드는 사업이 선정됐다. 그 배경엔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 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차가 다닐 터널을 만들어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가족, 친구들과 놀기 좋은 곳을 만들라는 얘기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주거형태에도 잘 드러난다. 더 높은 아파트에 프리미엄이 붙는 서울과 달리, 스위스의 경우 도심에 위치한 키가 큰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대를 형성한다. 스위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는 약 4~5층 정도 되는 높이에, 한 동마다 8~12 가구 정도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빌라나 다가구의 형태와 비슷하다. 이러한 주거 형태를 보눙(Wohnung)이라고 부르는데, 단독주택 (Haus)에 비해 가격이 낮고, 도심에서 구하기 쉽다. 높이가 높을수록, 가구수가 많을수록 기피하는 경향이 큰데, 이 바탕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처음 스위스에 왔을 때 머물렀던 곳, 가장 흔한 다가구 주택 형태의 주거 공간이다.


먼저, 도심의 편리함을 갖춘 아파트보다는 숲과 호수, 산과 가까운 주거지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창밖으로 초록이 보이고 마당에서 아이가 뛰놀 수 있다면 훨씬 큰 가치로 여긴다. 직접 샐러드나 허브 등을 가꾸며, 주말마다 잔디를 깎는 소소한 행복을 원한다. 물론, 나라도 작고 인구밀도도 낮으니 외곽에 살더라도 출퇴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거나 교통체증에 고통받을 일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한몫한다.


또한, 이웃들과 알고 지내는 관계에서 '안전'을 느낀다. 아파트의 규모가 커질수록, 벽을 사이에 두고 누가,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기가 어렵고 이웃이 바뀌는 경우도 잦다. 스위스 사람들은 소음에 민감하고, 사생활 노출을 매우 꺼린다. 특히 스위스에서는 이사가 매우 어렵고 세입자 보호가 엄격하기 때문에 한번 이웃은 십 년, 십오 년씩 이웃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익명의 다수보다, 소수의 이웃들과 서로 배려하며 믿고 지낼 수 있는 주거 환경을 선호한다.


마지막으로, 스위스인들 역시 주거 공간을 투자 대상으로 여긴다. 특히 단독주택은 장기적인 안정과, 세대 간에 물려줄 수 있는 자산의 상징으로 인식되며, 부동산 가치가 꾸준히 유지되기 때문에 노후 대비 수단으로도 간주된다. 최근 외국인들의 공격적인 부동산 투자로 현지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오른편인데, 스위스에서 세금 혜택이 가장 좋은 우리 캔톤(스위스의 주)의 경우에는 없어서 못 파는 게 땅과 주택이다. 이 때문에 용적률을 높이는 투표를 했는데, 반대표가 많아 무산됐다.


고층 빌딩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는 스위스 사람들의 특성상, 아파트가 10층만 되어도 많은 이들이 상업시설, 심하게는 수용소 같다고 여긴다. 하지만 스위스도 젊은 층들이 도심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아파트들이 더 많이, 밀도 높게 지어지고 있다. 대다수의 현지인들은 아파트에 왜 그 돈을 주고 사냐며 비판하지만, 재건축, 대도시의 발달을 생생하게 경험한 서울민국의 국민으로서, 이 동네 아파트값의 우상향을 꽤나 확신한다.


다만 서울과 다른 점이라면, 건폐율이나 용적률을 높이는 데에는 그 지역에 사는 주민들의 직접투표가 필요하고, 이렇게 안건을 상정하는 데만도 수년이 걸린다. 나아가 다수의 아파트들이 생기면서 오히려 단독주택의 희소성은 더욱 커지고 있고, 그래서 단독주택의 가격 상승률은 아파트의 그것보다 훨씬 가파르다. 덧붙여, 자연에 둘러싸여 살아도, 주말에는 더 순수한 자연으로 가고 싶어 하는 스위스 사람들의 특성상 앞으로도 단독주택을 선호하는 현상은 계속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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