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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동반자와 아이

스위스 사람들에게 '가정'과 '가족'

by 스위스 아낙

스위스에서는 자녀가 16세에서 18세 사이가 되면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한다고 본다. 그래서 짧게 보면 0세에서 15세까지는 가족 중심의 경험을 최대한 많이 공유하고자 한다. 아이를 위해서 부모가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아이가 '함께' 행복하고자 시간을 같이 보낸다. 자연 속에서 뛰노는 야외활동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함께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시기를 ‘학업의 골든타임’ 또는 '인생 성공의 발판'으로 여기며 공부에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의 주말은 학원과 과외로 가득 차고, 일주일 내내 가사노동과 업무에 시달린 부모는 조용한 휴식을 원한다. 그렇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흘러가고, 아이가 성장한 뒤 비로소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작 아이는 이미 자기만의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양질의 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이유를 개인의 인식 차이로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의 발전과,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크다. 나의 경험은 서울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 다른 지방 도시에서는 어떤지 잘 모른다. 하지만 서울 안에서 주말에 움직이려면 자연으로 가까이 가는데만 왕복 2~3시간은 기본이고, 이에 더해 교통 체증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봄에는 미세먼지 때문에, 여름과 겨울에는 덥고 추워서 박물관이나 쇼핑 및 문화센터로, 가을에는 추석연휴와 함께 임팩트 있는 한방을 위해 해외로 떠난다. 사람 많은 곳에서, 사람 많은 곳으로 간다.


아이의 유년기는 부모에게도 소중한 시간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는 것의 초점을 '아이를 성공적으로 키울까'에 두지 않는다. 개인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때문에 가정을 꾸리고 싶고, 가족이 생기면 삶의 궁극적인 기쁨으로 여긴다. 이게 웬 교과서적이고 말인가 싶을 수도 있겠다. 30대 중후반이 넘어선 싱글을 대하는 스위스인들의 시선은 대개 '연민'이다. 유럽 내에서도 보수적인 스위스의 분위기도 영향이 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노총각, 노처녀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스위스 사람들은 대개 노총각, 노처녀를 '외로움'과 연관 짓는다. 삶의 동반자인 배우자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 인생의 가장 특별한 순간인 생명 잉태와 탄생의 경험 부재, 이에 대한 연민이다.



비혼, 비출산이 많이 늘어난 한국 사람들의 눈에 굉장히 올드하고 시대에 뒤처진 발상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다. 혹은 극단적인 가족주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톡 까놓고 말해서, 나가면 자연뿐인 스위스에서 가족이 없이는 너무나 심심하다. 혼자서도 놀거리가 무궁무진한 서울과는 다르다. 그런데 몇 해 살고 보니 이 차이가 크다. 일주일 내내 사람이든, 업무이든, 학업이든 이리저리 치이고 나면 주말에는 휴식이 필요하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자기만의 시간에 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스크린 타임이다.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 태블릿 정도가 되겠다. 이때 우리의 마음과 뇌는 진짜 휴식을 취하기 어렵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배우자와 함께라면, 그리고 그이와 함께 세상에 소개한 새 생명과 함께라면 휴식의 형태가 달라진다. 인터넷이 될 듯 말듯한 산속에서 머물며 아이는 뛰어다니고, 배우자와 함께 시답잖은 농담도, 깊이 있는 대화도 나누게 된다. 물 맑은 호숫가에서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수영을 하고, 부모는 책도 읽고 바비큐도 즐긴다. 이들에게 가족은 주말까지 '부양' 또는 '책임'져야 할 존재가 아니다. 내가 진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렇게 쓰고 나면, 그런 스토리는 드물게 있는 아주 이상적인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랑에 대한 '허상'을 꼬집고 싶다. 뜬금없이 무슨 말이냐 할 수도 있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상적인 배우자는 불타는 사랑의 대상이고, 아름다운 가정은 착하고 공부 잘하는 어린이와 그렇게 아이를 키워내는 엄마, 이를 뒷받침할 부유한 아빠로 이루어진다. 틀렸다. 그런 배우자, 가정은 콘텐츠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가정이었을 뿐이다. 좋은 가정에 대한 기준은 집집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는 흔히 나를 전부 이해하고 사랑해 줄 배우자와 내 말이라면 모두 잘 들을 아이가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산다. 사회생활, 조직에서는 인정받고자 애를 쓰지만 배우자와 아이에게 사랑받고자 노력하는 일은 점차 소홀해진다. 살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존재가 당연해지고, 밖에서 있었던 힘든 일을, 짜증 섞인 기분을 쏟아내면 가정에서 누군가 위로해 주고 토닥여주길 바란다. 그리고는 미디어가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행복한 가정과 비교한다.


스위스 사람인 남편의 아버지 (시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퇴근 후 차 안에서 숨 고르기를 했다고 한다. 사회인에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역할 전환을 하는데 필요한 숨 고르기였을 테다. 열 살도 채 안 됐을 때 봤을 텐데, 이 기억이 남편에게는 매우 강렬했나 보다. 본인 주장이 매우 강한 시어머니도 시아버지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집안으로 끌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테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남편은 상사에게 물은 적이 있다고 했다. 본인 스케줄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어떻게 가정에서의 역할도 해내냐고. 글로벌 대기업 수장인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회사일을 집으로 끌고 가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한다고.


이러한 On / Off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스위치가 있으면 물질적인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일터와 정신적인 삶을 지지해 줄 가정이 구분이 된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는 말에 대기업 임원이라 답할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터에서의 On을 가정에서의 On으로 바꾸지 못하고 Off 스위치가 고장나버리면, 가족이 나의 행복이 아닌 부담이 되어버린다. 모든 가족 구성원, 또는 적어도 부모의 스위치만이라도 잘 작동을 하면 가정은 마음의 위로와 정신적 회복의 중심이 된다. 24시간 일터인 주부는 그럼 Off를 어떻게 하냐고? 주부가 남성이 되었든, 여성이 되었든 가사노동과 육아 외에 관심과 노력을 둘 다른 일이 필요하다. 하루에 단 한두 시간이라도 적극적으로 Off 버튼을 눌러 취미이든, 독서나 운동이든, 가사 외 다른 일에 집중해야 한다.


경제 발전의 소용돌이 속에 주 7일 근무와 가사노동을 견뎌 온 60, 70세대와 그 아래서 하루 16시간의 학업을 견뎌 온 30, 40 세대에게 이런 스위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고 24시간 주 7일 몰입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만연하다. 스위스 사람들은 인생이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점을 안다.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없고,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는 일을 언제나 우선순위에 둔다. 이러한 방식의 사고가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로 자리 잡게 되면, 엄마만 희생하면 되는 가정, 아빠만 견디면 되는 가정, 또는 아이만 참으면 다 되는 가정이 아니라 다 함께 노력하고 어떻게 서로를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추상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글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가정과 가족에 대한 고민은 살아가는 동안 꾸준히, 언제나 하게 될 생각이라 결론이 없다. 다만 2025년 현재의 필자가 읽어내는 스위스 사람들의 가정에 대한 접근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정에 대한 시선을 정리해 보고 되돌아보는데 의의를 두고자 한 글 한쪽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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