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은 험하게 할지언정 보행자를 우선으로 여겨라
프랑스 도로교통법 그 이상의 무언가
앞선 두 글에서 파리의 험한 운전 환경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토록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파리, 아니 프랑스 도로에는 지켜야 할 절대 원칙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무슨 일이 있어도 보행자가 먼저라는 것.
이건 도로교통법 그 이상의 무언가다.
보행자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오든, 횡단보도가 있든 없든, 신호가 파란불이든 빨간불이든(이 사람 적록색맹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보행자가 한둘이 아니다.)
사람이 차도에 발을 디뎠다면 그 순간 차는 무조건 멈춰야 한다.
파리의 보행자들은 말 그대로 ‘도로 위의 왕’이다.
물론 속은 엄청 터진다.
차가 다가오는 걸 보고도 당당하게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 이어폰을 끼고 아예 주변을 보지도 않은 채 도로를 건너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라면 경적을 울리거나 창문을 내려 한마디 했을 상황이지만, 파리에선 그러지 않는 게 좋다.
정말로.
괜히 클랙션 눌러봤자, 돌아오는 건 매우 심한 욕일 확률이 높다.
심지어 보행자들이 차 앞을 가로막고, 발로 차를 툭툭치고 갈 수도, 더 큰 시비가 붙을 수도 있다.
게다가 경찰이나 주변 사람들마저도 보행자 편이다.
당신이 아무리 억울해도, 그 누구도 당신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한 번은 집 주차장에 들어가려는데, 한 보행자가 주차장 입구를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흑인 할머니였는데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정말 느리게, 거의 멈춘 듯 걷고 계셨다. 실제로 멈칫멈칫하시기도 했다.
'혹시 차가 있어서 건너기를 주저하시는 건가?' 하는 생각에 먼저 가시라고 손짓을 했으나 그 할머니는 내 차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여전히 멈칫멈칫하고 계셨다.
내 손짓을 못 보셨나 싶어서 다시 한번, 마치 백화점 주차장에서 하듯 "먼저 가세요"라는 손짓을 더 크게 해 보았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내 쪽을 보며 뭔가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셨다.
당황한 나는 창문을 내려 "네?" 하고 물었더니 돌아온 말은—
"간다고!!! 거 진짜... (중얼중얼)"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가 뭔가 기분이 안 좋은 하루였을 수도 있다.
몸이 불편하신데 내가 두 번 손짓을 한 걸 재촉한다고 생각하셔서 기분이 상하셨을지도 모른다
(맹세컨대 나는 정말 호의로 손짓을 한 거였다.)
하지만 내가 건넨 호의가 그렇게 돌아오니까 나도 순간 욱했다.
"왜 그렇게 말해요!? 먼저 가시라고 배려한 건데!?"
옆에 있던 젊은 청년이 뛰어와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뭔데 할머니한테 그래?!? 미쳤어!?"
억울해서 미칠 것 같던 나는 "아니 먼저 가시라고 하는데도 나한테 뭐라고 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배려한 게 죄냐고!!!"
내가 보행자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다가 시비가 붙은 줄 알았던 청년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나에게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고, 계속 나를 향해 중얼중얼 욕을 하는 할머니가 빨리 주차장 입구를 떠날 수 있게 도와드리고는 떠났다.
이곳에서는 사실관계 따윈 중요치 않다. "운전자가 조심해야지."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된다.
그러니 파리에서는 운전 중 갑자기 누가 튀어나오더라도, 길막을 하더라도
짜증도, 분노도, 클랙션도 잠시 넣어두고, 그냥 멈추자.
그리고 조용히 그들을 보내주자.
이것이 프랑스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하나의 생존법이다.
운전은 험하게 할지언정 보행자를 우선으로 여겨라
